낳고 낳고 낳고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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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1일(목) 12:00

1880년 광주 불로동에서 태어난 최흥종(崔興琮)은 목포 경찰책임자 총순(總巡)직과 양조장 사장 직을 포기한 김윤수(金允洙:1860~1919)의 영향으로 예수를 알고, 믿기 시작하여 광주양림교회를 다니면서 1908년 초부터는 광주 기독병원 원장 윌슨(R. M. Wilson)의 조수로서 장래 의사로서의 안정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목포에서 김윤수의 개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오웬(C. C. Owen)은 1909년 4월 전라도 장흥에서 선교하던 중 쓰러져서 광주 기독병원으로 실려왔는데 진찰결과 급성폐렴으로 결론을 내렸다. 너무나도 위중하여 윌슨은 목포선교부 의사 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를 초청하였는데, 그는 광주로 오다가 "살려주세요"라는 가냘픈 여자 소리를 들었다. 그 여자는 생명이 끝나가는 여자 나환자였다.

포사이드는 말에서 내려 시궁창에 처박혀서 손을 내미는 여자 나환자를 자신의 팔로 품어서 자신이 탄 말에 태우고 광주 선교부로 도착하였는데 오웬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날로부터 나환자들 사이에 광주로 가면 미국인 선교사들이 치료해 주고,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소문이 퍼졌고 나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웬의 장례를 마치고서도 포사이드는 자신이 데리고 온 여자 나환자를 비롯한 여러 나환자들을 돌보느라 그냥 광주에 있었다. 하루는 최흥종이 윌슨 의사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원장 사택을 나서는데 여자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부축하면서 병원으로 가는 포사이드와 마주쳤다. 여자 나환자가 놀라서 손에 쥔 지팡이를 떨어뜨리자 포사이드는 최흥종에게 "형님 그 지팡이 좀 집어주세요"라고 했다. 최흥종은 지체하다가 지팡이를 집어주었지만,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나환자를 부축하면서 병원으로 가는데 나는 지팡이 하나 집어주는데 망설이다니 그러고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일까…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가? 최흥종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최흥종은 몰려 온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봉선동에 있는 자신의 땅 1만평을 내 놓고 나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로서의 수업을 포기하였다. 나환자들은 광주 봉선동에서 1909년부터 1927년까지 약 7백여 명이 생활하면서 치료를 받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정책에 따라 오늘날의 여수 애양원으로 이주하였다. 최흥종은 이주 비용으로 15만원을 기부하였다. 그 당시 신문사 기자 월급이 30원이었다. 1932년에는 4백여 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앞에서 15일 동안 연좌투쟁한 결과 당시 남차랑(南次郞) 총독으로부터 얻어낸 나환자들의 집단 치료소가 소록도이다. 이렇게 치료를 받기 시작한 나환자들이 음성으로 판명된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자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을 위하여 1958년에 '호혜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 그의 죽음은 광주 시민장으로 추앙을 받았다.

한 선교사가 나환자의 눈물 속에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더니 그 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 한국인 최흥종이 또 다시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은 선교사와 한국인들의 삶 속에서 '낳고, 또 낳고'를 거듭하면서 이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려는 마음을 '낳고' 있다.

차종순총장/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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