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삶나의신앙 ] 김수웅장로 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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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03일(수) 14:43
▲ 김수웅장로(온누리교회 ㆍCBMC 회장) |
나는 혼자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4월17일 평양에서 태어난 나는 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이념과 체제 갈등이 일어나 고향인 평양을 떠나 황해도 옹진으로 일종의 피난을 가게 됐다.(옹진은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당시는 38선 이남으로 남한에 속해 있었다)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고 있던 어느날 새벽 내가 살던 지역에 폭탄이 비 오듯 쏟아져내렸다. 1950년 6월25일이었다. 폭격이 너무 심해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도 오르지 못하고 지하참호에 숨어 있었다. 하필 평양에서 피난 온 곳이 비행장을 차지하기 위해 남북이 맞붙는 격전지였던 것이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우리 가족은 어느날 지하 참호 속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국군이 6군데 총상과 파편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이 군인을 응급치료하고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주어 가까스로 살아났다. 얼마 후 회복되어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충남 보령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한의사였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며칠만에 기력을 회복한 그는 배편으로 고향으로 내려가며 보령으로 피난오면 꼭 자신을 찾아 달라고 당부했다.
시간이 지나 1ㆍ4후퇴가 시작되자 우리 가족은 피난을 단행했다. 부모님과 나는 짐보퉁이를 대충 꾸려 비설포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파 속에서 어머니와 헤어져 나만 홀로 보령에 떨어지게 됐다. 그러나 베푼 복은 돌아오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어머니가 치료해준 그 한의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보호를 받다가 나를 찾아온 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한 일도 있었다.
▲ CBMC한국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수웅장로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불리지만 처절한 인생의 쓴 맛을 맛본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
그러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었다. 입원 후 터질듯한 울분을 쏟아놓는 나에게 의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보라"고 권했다. 잔잔한 물소리 같은 의사의 말에 나는 난생 처음 성경책을 펴 들었고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읽다가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더니 나는 순식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다. 이 기쁨 속에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야말로 새로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퇴원 후 나는 빚을 진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며 새 삶을 시작했다. 비록 빚만 잔뜩 진 채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나는 내 인생의 2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리 표현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