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초만에 도시 집어삼킨 지진

[ NGO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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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6일(화) 18:38

노경후
굿네이버스 아이티 사무장

자다 깨다를 여러 번, 뉴욕을 거쳐 꼬박 24시간을 날아서야 도착했다. 중남미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아름다운 카리브 해 연안의 섬나라. 흑인 국가로서는 가장 먼저 주권을 얻은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그러나 오랜 내전과 가난으로 인구 9백만 명 중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 국민의 75%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나라. 아이티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뜨겁다 못해 따갑기까지 한 공기가 입 안을 메웠다. 햇빛이 너무 강해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업장으로 이동하는 차장 밖으로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찢겨진 건물과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강도 7.0 지진의 위력을 실감했다. 35초였다. 2백년만에 아이티를 찾아온 최악의 지진은 단 35초만에 도시 전체를 집어 삼키고,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아이티를 순식간에 잿빛 돌무덤으로 바꿔버렸다. 아이티 정부가 공식 집계한 사망자 수는 약 30만 명으로, 웬만한 도시 인구 전체가 사망한 것과 맞먹는 수치다. 아이티 지진은 가난했기 때문에 복구 작업도 더뎠다.

지진으로 교도소가 붕괴되고 구호물자 배분이 지연되자 오랜 굶주림으로 사람들의 눈빛은 점점 변해갔다. 약탈과 강도가 성행하고, 아이들은 시신과 함께 길거리에서 잠을 잤다. 연약한 부녀자들의 성폭행 문제가 야기되고, 시체 썩는 냄새가 도시를 참담하게 메웠다. 강도 높은 여진(餘震)이 몇 차례 이어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으며, 도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지진의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혹독했다.

지진의 진앙지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레오간(Leogane) 지역에서 피해 조사를 하며 만나게 된 파비엔(Fabienne, 여, 10세)은 지진으로 홀어머니를 잃고 오빠 루이장(Louis Jean, 남, 21세)과 천막촌 내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지진 당시 건물 벽에 깔렸다가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당시 벽돌에 맞아 휘어진 팔은 치료를 받지 못해 굳은 채 밖으로 휘어져 있었고, 아이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다. 지진 당시 상황이 잊혀 지지 않는 듯 파비엔의 눈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평소에도 가난했지만 지진으로 더욱 먹을 것이 없어져 아이의 몸은 가눌 힘 조차도 없이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파비엔 남매가 홀어머니와 네 명의 의붓 동생들과 함께 살던 벽돌집은 지진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돌무더기가 됐다. 홀어머니는 지진 당시 집안에서 숨졌고 살아남은 네 명의 의붓 동생들은 계부가 데리고 떠나버렸다. 남매의 식사는 멀리 사는 친척에게 가끔씩 얻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오빠 루이장은 "오랫동안 먹지 못했다. 파비엔은 지진 이후 고열과 마른기침으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비엔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초진을 받아본 결과 당장 사망할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세균성 결핵이었다. 원인은 영양실조와 깨끗하지 못한 환경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는 파비엔 남매와 같이 지진으로 고통 받는 아이티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지진 발생 25시간 만에 아이티에 긴급 구호팀을 급파했다.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Port-au-Prince)를 중심으로 재난 초기에 긴급하게 수행해야 하는 식량 및 식수 배급과 의료지원, 텐트 지원, 방역 등의 구호활동을 3개월 간 집중적으로 실시했고, 요보호 대상 중에서도 가장 보호가 필요한 싱글맘들을 위한 캠프를 포르토프랭스에서 최초로 마련했다. 또한 수도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레오간 지역에서 아이티 사람들이 지진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장기 재건 사업을 착수했다.
 
앞으로 필자는 사상 초유의 지진사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아이티를 돕기 위해 굿네이버스가 펼쳤던 긴급구호활동을 담아 잿빛 돌무덤에서 희망이 피어나는 과정을 생생히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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