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 소설가 '박화성'과 '한귀(旱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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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1일(목) 10:13

 
지난 16일 박화성연구회(회장: 서정자) 주최로 목포문화원에서 제4회 박화성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필자는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과 박화성이야기'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그 내용을 여기에 모두 소개할 수 없지만 전남노회 소속 광암교회(나주시 금천면)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표를 하였다.
 
광암교회를 무대로 쓴 한귀(旱鬼)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내용은 광암 들녘에 비가 오지 않아 주민들은 금성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드렸지만 여전히 비가 오지를 않았다. 이러한 일이 3년간 연속적으로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3년째 맞이하는 광암 들녘에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는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이때 기우제를 주관했던 광암리 마을 사람들은 묘지를 찾아다니면서 묘 자리가 이상하게 생긴 묘마다 다른 데로 이장(移葬) 하라는 말을 듣고 이장을 하였지만 끝끝내 비가 오지 않자 마지막 결론이 광암리에 서양 귀신을 믿고 있는 광암교회가 있어서 산신령이 예수쟁이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동내에서 교회당을 때려 부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광암교회 김재섭집사는 교인들과 의논을 하고 새벽에 교회당을 지키어야 한다면서 전교인이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밝아오면서 마을 주민들은 교회당을 부수기 위해서 삽과 곡괭이, 망치들을 들고 교회당을 향하여 가는데 난데없이 번개불이 천둥을 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당을 쳐부수겠다고 왔던 지역 주민들이 혼비백산하여 모두들 도망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이 남겨진 것이 한귀(旱鬼)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썼던 박화성은 광암교회 김재섭집사가 형부가 되며, 박화성 언니는 박희경이었다. 김재섭집사는 광암리에서 농토를 많이 경작하는 부농의 자녀로 출생하여 광주 숭일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학교 영어교사로 일을 하였다. 박화성 언니는 전주기전학교 교사로 활동을 하다가 선교사의 중매로 결혼을 하고 나주 광암리에 자리를 잡고 광암교회 내에 광암학당을 설립하였다. 학당장은 김재섭집사가 맡았으며, 그의 부인은 교사로 부부가 활동을 하면서 낮에는 어린아이들에게 또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비롯해서 교육을 사명으로 알고 이곳에서 사역을 하였다.
 
'한귀'라는 소설을 발표했던 박화성은 1904년 목포에서 출생을 하였으며, 일찍이 부모님을 따라 목포 양동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린 박화성은 프레스톤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성장하면서 목포정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시 서울로 유학하여 정신여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이 일로 그는 신앙의 힘으로 성장해 갔었다. 이 무렵 숙명여학교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자 전학을 하였다.
 
다시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진학을 하여 그곳에서 '추석전야'라는 작품으로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데뷔하였다. 박화성 작가가 쓴 소설은 거의가 식민지시대의 조선 노동자 착취와 조선 여성들의 인신매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설이었다. 이러한 소설의 내용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서술을 하였으며, 이 일로 식민지시대에는 단편 소설 19편과 장편소설 '백화', '하수도공사' 모두가 소외받고 있는 가난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었다. 분단 시대에는 장편으로 '고개를 넘으면', '벼랑에 피는 꽃', '내일의 태양' 등을 발표하였다. 60년대는 '약자의 편에 서서', '홍수전후', '즐겨선택 한 십자가' 등을 발표하였다. 그가 남긴 작품(장편, 단편)은 1백권이나 되며, 그가 8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 할 때 수유리 한신대에 있는 송암교회 기원형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가졌다.

김수진
목사ㆍ교회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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