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과 역사의식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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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29일(수) 14:21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불리우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고, 특히 시간(역사)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아무리 탁월해도 사람처럼 일기나 역사책을 쓸 줄 아는 원숭이는 없다. 인간만이 백미러를 보듯이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보고, 죽음의 종착역까지 남은 세월을 계수하며(시90:12)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한다.

책 중의 책으로 불리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이스라엘과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통찰하는 역사책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70여년(?) 뒤에는 누구나 맞이할 개인적 종말(히9:27) 및 예측 불가능한 우주적 종말(마13:39; 24:36; 28:20) 앞에서 모든 기독청년들이 필수적으로 그리고 심각하게 역사를 의식해야 함을 가리킨다.

필자가 1987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무렵, 극도로 혼란한 정치상황을 고려하여 귀국하지 말고 가능하면 미국에 머물라는 부친의 권고를 부득이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실은 이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필자는 성서학 전공자로서 종말론적 역사관을 성경의 중심축으로 인식했고, 특히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서진(西進)을 계속한 세계사의 방향, 즉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태평양과 인도양을 거쳐 마침내 땅끝 곧 복음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가나안 땅에서 막을 내리게 될 인류역사(마24:14; 행1:8)의 방향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선교'의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특히 서쪽으로 부는 성령의 바람에 편승하는 것을 복과 은혜로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청년이 견지해야 할 성경적 역사관은 신본주의 역사관으로서 그 핵심 내용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 즉 야웨 하나님께서 우주만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백만분지 1초까지도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신본주의 역사관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 다름아닌 요셉과 사도 바울이다. 창세기(45장)에서 대서특필되는 요셉의 역사관에 의하면, 자신을 애굽에 판 형들의 미움도, 고통스런 애굽에서의 종살이도 결국은 자신을 총리대신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믿었기에 그는 형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고,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사도 바울도 이와같은 역사의식 가운데서(롬 8:28; 8:18) 그토록 험란했던 전도여정을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살전5:16-18).

이와같은 관점에서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6)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역사적 질문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며,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 섭리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특히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몰락과 교회들의 쇠퇴와는 달리 급속도의 경제부흥과 선교열정을 누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역사적 사인(Sign)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롬12:1-2).

장영일총장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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