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25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9월 16일(목) 14:12

월-온전히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본문: 신 16:13-15
찬송가: 220장(구 289장)

유목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의 3대 명절(신16:16-17)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모두 농사와 관련이 있다. 가나안 토착민들의 농사 축제를 자기들의 신앙적 경험을 담아 자기 민족의 축제로 변화시킨 것이다. 레23:33~36, 신12:7, 사12:2-3, 사30:29 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명절이 자기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맘껏 찬양하는 절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아직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인정하지 않아 기독교인들의 유대절기 동참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대량학살의 희생물이 되었던 역사적인 배경에는 유대인들 스스로의 자폐적인 신앙관과 이기적인 전통도 무관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최대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을 자기 민족만 받아서 누리고자 하는 이기심에 기인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의 전통과 절기를 자기들의 것으로 승화시켜서 자기화 하는 데에 발빨랐다.
 
이제 우리 기독교를 돌아보자. 모든 복은 자기가 받아야 하며, 자신의 가정, 교회는 복의 근원이요 항상 부흥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은 유대인의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니체는 그 사회의 헤게모니를 획득한 교회를 향해서 "당신들이 믿는 그 교회의 신은 죽었다"고 외쳤고, 키에르케고르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와 함께 영적으로 병들어 쇠약해져 가며,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아파했다. 다가오는 명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을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누리는 풍요를 미처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못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때에 칭찬받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 성 훈 목사
효목제일교회 시무


화-인간의 계획 하나님의 계획
본문: 창 22:1-18, 사 55:8-9
찬송가: 312장(구 341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최고의 믿음, 순종의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바치는 일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피상적으로 보면 손해요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요 단편적이고 얕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고집의 포기가 실상은 가장 큰 복과 유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지름길이다. 
 
give up은 성경적인 단어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계획, 고집을 포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위를 향해(up) 드리는 것(give)이다. 인간의 계획이 끝장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 포기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힘을 주고, 복이 된다. 하나님이 달라고 하실 때 가장 귀한 것도 아끼지 않고, 위를 향해 드릴 수 있었던, 포기를 잘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준비된 놀라운 계획과 본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도록 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해주셨음을 보라.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펼쳐나가신다. 포기(Give up)는 위를 향해(up) 드리는 것(give)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생각과 계획을 펼치시도록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의 생각과 고집을 포기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강 덕 목사
명수대교회 시무


수-그래도 구하자
본문: 겔 36:33-38
찬송가: 288장(구 204장)

세계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으로부터 유다가 독립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다. 분문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유다를 독립시키기로 작정하셨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이루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

범사가 잘되고, 잘 살더라도 기도해야 한다. 사람이 잘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하고 잘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넉넉한 것 같이 보이고, 부자같이 보이고, 성공한 것 같이 보이고, 오래 지탱할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문제가 되고,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고, 좌초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속도가 느릴 수도 있고, 예측출허의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고 잘사는 경우 사람들은 어느새 교만해지고, 나태해지고, 하나님을 잊고 교회를 멀리하고, 사명에 충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잘살더라도 기도해야 한다. 영육이 강건해도 기도해야 한다. 마음이 평안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고통과 절망에 처한다해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버틸 수 있는 힘이고, 이길 수 있는 지혜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는 생명이고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이다. 기도로 모든 삶을 승리해 나가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가 호흡을 하듯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끊임없이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 두 성 목사
제주화북교회 시무


목-내 영원한 고향을 찾아서
본문: 히 11:6-16
찬송가: 235장(구 222장)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때 공원지기가 다가와 "해는 지는데 여기서 뭘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쇼펜하우어는 "내가 지금까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귀성객이 되어 고향집으로 간다. 가는 길이 교통체증으로 막히고 힘이 들어도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향의 산과 냇가가 그리워서일까? 추억이 많은 뒷동산 때문일까? 아니면 죽마고우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사랑이 자녀들을 고향으로 강권하게 이끄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어디일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향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에 안기고 싶어 그리스도인들은 본향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이 전부인양 이 땅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사람들과는 목적과 방향과 가치관이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땅이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언제나 나그네로, 외인처럼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저 높은 곳 하나님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수시로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바뀌고 있는 썩어져 가는 것들을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가슴인 것이다. 그 사랑을 향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의 기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때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 영 배 목사
번성하는교회 시무


금-신앙의 대 잇기
본문: 창 17:1-7
찬송가: 310장(구 410장)

"부자치고 3대가 잘사는 부자 없다"는 말이 있다. 3대가 잘사는 부자가 없다는 것은 부자의 후손들이 검소하게 선조의 부요함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을 3대까지 이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식언이 없으시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그 자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경우들이 많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이런 일들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민 중에 선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 살아 남기위해 바로 왕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또한 아브라함은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며 할례의 언약을 세우셨다. 할례의 언약은 '내가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세운 영원한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이 할례의 의미는 아브라함 자신은 물론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살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양육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들도 신앙의 3대를 넘어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해야 함을 말한다.

오늘의 기도

자손대대로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자손 3대의 신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 두 호 목사
염광교회 시무


토-가난한 과부의 헌금
본문: 눅 21:1-4
찬송가: 455장(구 507장)

예수님 당시 과부들은 재정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늘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과부 중에서도 극빈한 사람이었다.
 
랩돈이라는 돈의 단위는 유대나라에서 사용되는 화폐의 최소단위이다. 예수님 당시 노동자가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이 한 랩돈이라면 이것을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을 할 때, 하루의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한 랩돈은 781원에 해당한다. 두 랩돈이라면 1,562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들 보다 헌금을 더 많이 하였다고 칭찬하셨다.
 
주님은 양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질을 보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과부의 헌금은 자기의 전 재산이지만, 사람들에게 오히려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사람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다.
 
어떤 유력한 사람들이나 부자들이 거액의 헌금을 하면 그 사람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하면서 교회가 인정해 주고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을 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힘겨운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서 헌금을 했을지라도 그 액수의 단위가 낮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헌금에 대해서 누가 얼마를 했느니 하는 등의 내용에 대해서 목사와 회계만 알 수 있게 하고 그 외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헌금 계수 위원들에게도 교인들의 헌금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헌금에 의해서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다른 사람의 재정 능력을 평가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께 칭찬받는 과부의 헌금을 늘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 종 준 목사
동암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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