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선교의 전초 기지

[ 연재 ] 사도바울행전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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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14일(화) 15:15

   
▲ 다메섹의 아나니아의 집.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회심 후의 비교적 조용한 내적 침잠의 생활을 하며, 밖으로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디모데와 디도 등 젊은이들의 신앙 지도를 하고 있을 때, 한편 시리아 안디옥에는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행 11:19)이 밀려들었다. 따라서 당시의 안디옥 교회는 새 신도들이 더하여 신앙의 열기가 타오르고, 복음 전도의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도들 중에는 지중해의 구브로와 아프리카 북해안 구브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를 말하였고, 유대인 이외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행 11:20).

지금까지 유대인에게만 전해지고,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만 행해지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가 이제 그 테두리를 넘은 것이다. 널리 이방인도 부르는 새로운 선교 역사, 이것은 실로 기독교 선교 역사상 획을 긋는 움직임이었다.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전초 기지 시리아 안디옥은 현재 터키의 동남쪽 끝 오론테스 강 남쪽, 표고 4백70m인 시르푀우스 산 북쪽 자락에 있다. 터키어로는 안타키야라고 일컫는다.

안디옥은 중간 시대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재위 전 305~281)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서부 도시로 창설하였고, 기름진 평원과 통상 활동을 경제 기반으로 하여 번영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장군으로서 '승리자'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던 니카토르는,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안디옥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주전 307년에 자기 부하 장병들 5천3백명을 이 도시에서 살게 하였다. 그 후 주전 64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 속주 시리아의 수도로 정해졌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다음인 로마 제국 제3의 도시로서, 인구 5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도시 북쪽 오론테스 강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는 시리아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오론테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지중해에 닿는 실루기야 항구가 있다. 바울은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전도 여행에 나섰다. 안디옥 북쪽에는 아마누스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소아시아로서, 남쪽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 뻗어 있다.

안디옥 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그 성벽에는 3백군데 이상 파수꾼의 탑이 있었다. 시가지의 주민은 본토박이 시리아 인 이외에 잘난 체하는 로마인, 쾌락을 탐하는 헬라인,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안디옥의 이방인 중에는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시나고그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중 안디옥에 피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 안내하여 교회를 이루게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초대 교회의 제2 어머니 교회로 성장하였다. 훗날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20년에 걸친 선교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적 기독교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은 반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였고, 외국 전도의 근거지로서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가 있었다.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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