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삽시다!

[ 생명의양식(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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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25일(수) 15:17

▶ 본문 :  사 7 : 14~16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생명(生命). 이 얼마나 고귀한 말입니까! 생명이라는 말이 고귀한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고귀한 것이기에 그 말을 듣기만 해도 한없이 숭고해집니다. 사방으로 인공적인 것들에 압도당하듯 둘려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온 세상 천지가 결코 인위적일 수 없는 생명으로 그득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고 느낍니다. 이유는 내가 생명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는 매순간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으로 충일합니다. 이 생명으로 오늘도 우리는 삶을 엮어나갑니다. 그렇기에 생명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생명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 생명이 몸에서 시작하고 몸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으로 존재하고, 몸으로 삽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언제나 다른 몸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몸과 몸이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몸들이 함께 함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몸'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말로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몸으로 와서 몸들과 함께 하시다가, 그 몸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셨고, 다시 몸으로 부활하셨고, 승천하시면서 그 몸으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옛 약속과 새 약속을 이어주는 이 임마누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드러내는데 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은 인간이 몸으로 살고 몸을 이루며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기도 하며 생명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눈으로 보고 서로 만나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창조는 몸에 관한 이야기이며, 몸에 기초한 인권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몸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그녀)에게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또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이하는 그 사람, 그 생명을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나 존재를 믿는다 쳐도, 과연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아무리 많고 기독교인이 아무리 많으면 무얼 합니까? 생명으로 함께 하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존재방식도 모르고 그와 함께 한 적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고 거기에 무슨 기대가 일어나겠습니까? 몸과 몸이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것도 생명이신 하나님과 상관없습니다. 교회라든가 기독교라든가 하는 그런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에스겔 37장에 보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참담한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른 뼈만 남은 광경을 봅니다. 몸이 몸을 파괴하고 해체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은 인간은 이제껏 몸을 해체하는 생명파괴를 저질러 왔고, 지금도 그런 일들을 세계 도처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창조를 지향하는 임마누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범죄입니다. 몸을 멸시하는 곳에서는 인간들이 인간들을 차별하고 학대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이 전쟁인데, 전쟁은 몸을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생명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방지한다고 하면서 전쟁의 위험을 더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도 있습니다. 전쟁만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몸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신체적인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다른 몸을 학대하며, 상품화합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살면서 몸들에 의해서 학대받고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몸으로 몸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이 얼마나 청순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굶주리고 병든 아프리카 아이들을 몸으로 돌보는 나이든 오드리 햅번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마더 테레사, 그 주름진 얼굴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몸을 책임져야 하며, 모든 피조세계도 책임져야 합니다. 모든 몸,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우러지는 것, 이것이 창조질서이고 이 창조질서로 복원되는 것이 곧 구원이며, 임마누엘의 또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아름다운 몸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몸 존중 운동을 드러내야 합니다. 당신의 하루에도 이 아름다운 몸 존중 운동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이종윤목사 / 부산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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