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2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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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11일(수) 16:22

월-지금은 예배할 때
본문: 시 95:1-8
찬송가: 14장(구 30장)

인생은 위기의 고비고비를 타고 넘는다.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기를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할까?
 
지금은 예배드려야 할 때이다. 1906년 봄 하디 선교사가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 봄 학기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여기저기서 통곡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이 아닌 죄를 고백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성령님께서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부흥의 불길이 연동교회, 상동교회, 자교교회 등으로 번져나갔다.이 열기가 삼일운동으로 8.15 해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대의 위기는 우리를 예배로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종종 위기를 만난 백성들에게 예배를 통해서 구원하신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온 뒤 광야에서 겪은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회고하며 부른 노래로 본다. 어려울 때일수록,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원수가 강할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은 날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계셨다. 예배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예배가 형식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광야의 나침반은 예배이다. 예배자에게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신다. 양에게 필요한 것은 풀밭이 아닌 목자이다. 목자를 따르면 풀밭이 있고 쉴만한 물가가 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역사를 통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진리의 방향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 태 진 목사
광림교회 시무


 

 화-행복한 불편함
본문: 마 11:28-30
찬송가: 337장(구 363장)

한계효용으로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갖는 삶의 가치는 기준부터가 다르다. 짐이 아닌 보람과 자부심으로 충만한 인생을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가 충족되야 한다.
 
첫째는 '준비된 삶'이다.
 
목회자로서 자신의 설교를 읽어도 감동이 될 때는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다려지지만 충실치 못하게 준비하여 빈약한 내용일 때는 정반대의 마음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삶의 종착지가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을 때 지금 삶은 이 세상에서만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경험이기에 즐거움이다. 우리는 천국이 준비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마지막 경험이라 여기고 쉽고 행복한 불편함으로 알고 사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둘째는 '내게 유익함'을 느낄 때이다. 아내와 외출할 때면 주머니 속의 잡동사니를 아내의 가방 속에 넣어 달라고 하고 빈 주머니로 다니길 좋아한다. 그러나 헬스장에 가서는 30킬로그램 정도 되는 바벨을 땀이 나도록 들고 운동한다. 이유는 어느 정도 무게 있는 것을 들어야 내 몸에 좋은 운동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는 것조차 유익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고로운 삶이다. 삶이 짐이 안되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과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안에 있을 때 내 삶은 불편해도 즐거움이 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에 우리 삶의 수고로움이 보람으로 느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다. 아멘.

김 성 국 목사
망우교회 시무


수-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
본문: 빌 4:4-7
찬송가: 412장(구 469장)

유대인들은 만날 때마다 평강을 비는 뜻으로 '샬롬'이란 인사를 나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 때 그리스도 인들의 삶은 가장 값진 것이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사도바울은 항상 기쁨이 충만했다. 이 기쁨은 주안에서 가지는 기쁨이지 세속적인 것은 아니며 일시적인 것도 아닌 연속적인 기쁨이다. 인생의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자.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신다. 관용이란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용의, 성격의 친절성, 그리고 감정에 대한 전적인 절제를 의미한다. 기쁨을 지속하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살려면 남에 대해서 관용해야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관용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격려로서 그것을 보충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주의 재림이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너그러울 수 있다.
 
셋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신다. 염려가 생길때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시간임을 알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이럴 때의 기도도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한다. 감사 없는 기도는 결국 원망이요 염려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는 복종의 정신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은혜를 받았음에도 늘 원망불평하였습니다. 이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 문 덕 목사
대구삼영교회 시무


목-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본문: 요 6:1-14
찬송가: 134장(구 84장)

예수님의 요한복음의 첫 번째 기적이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이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벳세다 들판에서 말씀을 듣다가 배고픔에 지쳐 있는 이들을 배부르게 먹여주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각자 다르다.
 
먼저 빌립의 믿음이다. 주님의 명령을 돈으로 계산하는 믿음이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교회 안에서 예산이 없다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성도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안드레의 믿음이다. 그는 일행 중에 누가 음식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주님의 말씀에 발 벗고 나서는 믿음이다. 예수님 말씀에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란 믿음이다. 그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다. 적은 것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믿음의 정성을 다하여 주님 앞에 가져올 때 기적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의 믿음이다. 아이가 혼자서 그 도시락을 먹었다면 한 사람의 점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배고픔을 참으면서 예수님께 내어 놓으므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었다. 어린아이는 어떤 대가나 명성을 바라고 안드레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순수하게 바쳤다. 감사하여 드리는 예물, 믿음과 사명 때문에 바치는 헌신과 충성을 주님께서 받아주신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도 기뻐할 사람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굶주린 이북 동포들에게 먹을 것이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명령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 제 한 목사
창성교회 시무


금-나를 누구라 하느냐?
본문: 마 16:13-17
찬송가: 93장(구 93장)

같은 질문이라 해도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다르다. 아이들에게 "성공하려면 어려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학원가 한 복판에서 하는 것과 시장에서 하는 것과는 그 답이 사뭇 다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삶을 즐기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봉사단 앞에서 하는 것과 유흥가 앞에서 하는 것과는 답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예부터 바알의 신당이 많던 곳으로 유명한 도시였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 지역의 분봉 왕 헤롯 빌립을 위해 도시의 이름까지 바꿔 우상숭배를 조장했던 사악한 도시였다. 아마 눈에 보이는 곳곳에 바알의 신당과 황제의 신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큰 일을 맡기시려 한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이 맡아야 하는 중대한 시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나 떨어진 발립보 가이사랴 지역으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금 복음을 맡길만한 제자로서의 자격을 마지막으로 시험하고 계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다르게 살아도 너희는 나를 구주로 섬기며 살 수 있는냐?"하는 질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복음을 맡길만한 제자를 찾고 계신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돈과 힘의 가치관뿐인 이 우상숭배의 시대에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진정으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의 제자의 삶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말씀보다 돈에 대한 사랑이 앞섭니다. 사람의 힘을 더 의지하려 합니다. 베드로 같이 주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 대 식 목사
높은뜻정의교회 시무


토-자전거 탈 줄 아세요?
본문: 갈 6:7-9
찬송가: 430장(구 456장)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전거에 담긴 놀라운 비밀을 기억하고 자전거를 타듯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아무리 먼 길을 달려왔어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추고 만다. 우리의 신앙이 막 시작할 때는 세 발 자전거에 앉혀놓기만 해도 넘어지고 만다. 아예 자전거를 탈 수도 없다는 말이다. 신앙의 유아기 때 모습이다. 
 
그러나 걷고 뛰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세 발 자전거를 타게 된다. 신앙의 초보기, 신앙의 훈련기라 할 수 있다. 이때는 무엇인가 지지대가 있어야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이다. 옆에서 도와주는 리더가 있고, 믿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더 성장하게 되면 두발 자전거를 탄다. 신앙의 성장기이고, 이때 기어가 달려 있는 자전거라면 더 잘 달릴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힘을 의지해야만 더 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전거 타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끝까지 페달을 밟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자로 살아가고, 열매 맺는 길은 오래된 신앙이라고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었어도 내가 페달을 밟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심은 대로 거두고, 밟은 대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사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아 앞으로 나아가듯 성령의 힘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평생토록 내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도록 굳세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 재 홍 목사
납읍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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