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에 내 병원이 세워지다

[ 나의삶나의신앙 ] 나의삶 나의신앙-차봉오장로 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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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22일(목) 10:52
해방교회 원로ㆍ차 한의원 원장

1958년 12월 1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온몸을 감싸던 그날 난 20사단 연병장에서 새벽을 맞았다. 이날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바로 평생의 동반자인 선우영자장로와 백년가약을 맺기로 한 날, 결혼식날이었다.

   
▲ 차봉오장로는 해방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담배를 끊었다.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차봉오장로는 해방교회의 장로로서, 차 한의원의 원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86년 겨울, 해방교회 당회원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신동수 신경호 차봉오장로 이승하목사 한영복 한의덕 김장호 이두칠장로.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 기억도 나지 않는 비상이 전군에 걸려 휴가를 못나가고 대기를 명령받았다. 초조했다. 결혼을 올리기로 한 11시가 지났는데도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아찔했다. 부대가 일산이었는데 당시는 교통도 안좋아 당장 부대를 벗어난다고 해도 막막했다. 거기에 친구에게 양복도 빌려야 했고 이발소에도 가야 했는데….

마음은 벌써부터 해방교회에 가 있었지만 몸이 움직일 수 없었으니, 당시의 안타까움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 저리는 엄청난 기억이었다.

부대장이 나를 호출한 것이 오후 1시. 어떻게 남산에 올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김찬호목사님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나의 신앙의 동지이며, 반려자이자, 사랑하는 아이들의 어머니인 선우영자장로와의 결혼은 이런 난리통 속에 치러졌다. 가난했던 군인, 그것도 사병이었던 난 아내에게 금반지와 인조섬유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선물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아내는 늘 나에게 큰 힘을 주는 사람이었고 기도의 제단을 쌓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늘 나를 격려해 주는 든든한 후원자이며 믿음의 동역자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한의학 수업이다. 1953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서울한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국회에서 한의사법이 통과되고는 첫해에 한의학 수업을 시작한 셈이었다.

피난촌의 대학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부산 대신동 뒷산에 천막을 쳐놓은 것이 캠퍼스의 전부였고 교과서도 없어 모든 수업은 받아 적어야만 했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한 것은 나중에 한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됐다.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1960년 드디어 해방촌에 '차 한의원'의 간판을 걸었다.

말이 좋아 병원이지 침대 하나에 책상 한개가 전부였다. 가진 돈도 없어 백일 동안 매일 5천원씩 상환하는 일수를 썼다. 그래도 내 병원이 생겼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이웃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특별한 능력이 없었던 나는 환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진료를 했다. 개원 초기에는 환자가 별로 없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서부터 "고질병이 싹 나았다", "침을 잘 놓는다"는 등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매일 1백5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했고 병원은 점차 규모를 늘려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됐다.

1960년에 개원했고 지금도 환자들을 보고 있으니 난 해방촌에서만 50년 동안 환자를 치료한 셈이다.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성구가 무엇인지 물었고, 난 "없다"고 대답했다.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모두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굳이 한 두 구절만 기억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난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것 같다. 특별하지도 않고 남들보다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늘 성실하고 겸손하게, 성경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온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사랑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고백해 본다.

/정리 장창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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