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

[ 나의삶나의신앙 ] 나의삶나의신앙-차봉오장로 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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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15일(목) 13:28
차봉오/ 해방교회 원로장로, 차한의원 원장

"영변의 약산에는 올해도 진달래꽃이 피었나요? 어머니, 너무 그립습니다. 손수 끓여 주신 된장찌개의 맛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당장이라도 전해질 듯합니다. 어머니~~"

   
▲ 차봉오장로(사진 왼쪽)가 장로장립하던 날. 차 장로는 34살부터 해방교회 장로로 교회를 섬겼고 교단을 섬겼다. 그는 장로가 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끊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을 누렸다고 말한 바 있다. 사진은 장로장립 예식이 있던 날 찍은 사진.
1947년 월남한 후 나는 종종 흑석동의 나지막한 언덕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움 때문이었다. 고향이 어디쯤일까.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대답없는 외침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풍운의 꿈을 안고 월남했지만 꿈이 있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서울생활은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불확실한 미래로 가득차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무너질 듯 위태로울때마다 흑석동 언덕에 올라 어머니를 불렀고 오산학교 다니던 시절 기계적으로 들었던 하나님을 찾았다.

아직은 신앙이 없던 시절. 고등중학교 2학년 때 월남한 나는 단지 의학을 공부하겠다는 바람만 가졌다. 하지만 진학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했고,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맛봤다. 고생 끝에 결국 오산 시절 은사께서 교장으로 계시던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지긋지긋했던 공산당들이 자유세계의 벽을 넘어왔으니 그때의 충격은 상상이상이었다. 전쟁통에 피난행렬을 따라 피난을 갔고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졸업하고는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던 1957년, 나는 24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다. 나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나의 아버지. 그분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으셨던 분이셨다. 가까운 학교를 제쳐 두시고는 나를 오산학교에 보냈다. 오산은 대단했다. 과학관과 도서관, 체육관이 따로 있었고 넓은 운동장에서는 농구와 배구를 했다. 국제규격의 수영장까지 있던 학교였다. 하지만 나는 오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기독교 신앙을 접하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결국 군대에 가서야 신앙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됐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제대한 직후 27세이던 나는 해방교회에 등록을 했고 그해 차 한의원을 개원했다. 해방촌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해방교회에서 평생의 동반자인 선우영자장로(해방교회 은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선우 장로의 신앙은 매우 훌륭했고 늘 나를 인도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앙생활은 늦게 시작했지만 중직자가 된 것은 무척 빨랐다. 1967년, 내 나이 34살 때 장로로 장립받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끊고 하나님에게 붙들려 살았다. 그 세월의 행복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장로로서 살아온 40년 세월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해방교회의 원로장로이며 교단의 평신도단체 대표자를 지냈고, 서울서노회장으로 노회도 섬겼다. 한의학계에서는 대한한의사협회장을 지냈고 경희대 한의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1960년에 개원한 차 한의원에서 나는 지금도 많은 환자들을 돌보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를 나누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삶, 부족한 나의 인생의 조각조각들을 모두 4회에 걸쳐 내가 사장을 역임했던 기독공보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두렵고 떨린다.
 
/정리:장창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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