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부르신 뜻을 따라'

[ 디아스포라리포트 ] 디아스포라 리포트 '독일 국제교회' 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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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15일(목) 11:55
이성춘/총회 파송 독일선교사ㆍ독일 국제교회 시무

1993년 의미있는 33세가 되었을 때, 아내와 두 딸(2, 4살)의 손을 잡고 남방 산호섬인 필리핀으로 떠났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우리 가족은 희망적이고 들뜬 마음이었지만,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어린 손녀들을 보내는 어머니는 아픈 마음을 드러내셨다. 자식이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사지로 간다고 여기셨다. 게다가 아들 가족이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은 심정이셨다고 하니, 자녀를 선교사로 보내는 부모 선교사의 마음이 왜 안 그러실까.

   
▲ 이성춘선교사 가족.
비행기 안, 영공에서 필리핀 땅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사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그 땅에 전해지기를.

한국에서 3년 반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했었던지라 필리핀에서도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 필리핀 장로회신학대학, 필리핀 남쪽 롬불론 섬의 중앙신학교, 마닐라의 장로회신학교 등을 순회하며 열정적으로 필리핀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필리핀에서의 5년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다. 당시 필리핀은 한국 선교의 중심지로 변모해 있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선교사 수가 약 4백 여명에 이르자 현지인 지도자들은 선교의 모라토리움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인 선교단체들은 1996년부터 전략적인 선교사 재배치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 때에 바울선교회가 앞장서서 선교사 재배치를 실행했고, 많은 선교사들이 필리핀을 떠나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로 재배치되어 사역지를 옮겨 갔다.

나도 방파선교회와 바울선교회, 총회 세계선교부와 협의하에 필리핀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1997년 10월에 독일로 떠나왔다. 바울은 지혜자들인 그리스 사람이나 야만인인 독일 사람을 향해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롬 1:14). 나 또한 성실한 바울의 후손으로 독일을 향한 마음이 남달랐다.

한국에서 '선교사는 한국 땅에서 멀어질수록 고급스러워진다'는 말이 있다. 독일도 한국에서 5천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선교사로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한국 교회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을 방문할 때면, 유럽, 독일에서 선교사로 호강한다는 면박을 받기도 한다. 여기엔 약간 뚱뚱한 몸도 한 몫한다. 단벌인 작은 양복이 없어보이기보다는 몸매를 더 드러내, 뭔가 '있어 보이는' 모양이니 그 또한 어쩌랴. 그것마저도 은혜이니. 유럽에서의 선교 사역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생이다. 선진국에서의 사역은 그들과 비슷한 언어, 문화, 경제 수준을 맞추어 갈 수 없기 때문에 늘 부족하고 힘겨운 싸움을 요구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마틴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으로 유명한 종교개혁의 성지이자 대학도시인 마부르크(Marburg)에 정착했다. 당시 7살과 9살인 두 딸은 독일 집들이 동화책에서 보았던 것과 같다고 좋아했다. 아이들은 동화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과 희망은 한국에 IMF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사라져버렸다. 독일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은 매 끼를 걱정하며, 밥 대신 수제비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이런 위기는 2009년에도 또 다시 되풀이 되었다. 두번째 위기는 현재 사역하고 있는 튀빙겐의 국제기독센터 임대료를 매달 염려하면서 숨을 죽이고 살도록 이끌었다. 두 번의 경제위기를 한국이 빨리 탈출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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