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범주화 작업 필요

[ 교계 ] 윤치호박사기념사업회, 제1회 윤치호박사 학술세미나 개최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0년 06월 24일(목) 18:11
   
▲ 1904년 윤치호가 부친 윤웅렬(뒤에서 두번째)과 4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
좌옹 윤치호(1865∼1945)는 친일파가 아니다?

근대 개화기 민족의 대표자, 정치가, 교육자였던 윤치호박사. 일제강점하에서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출소 후 친일파로 변절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를 "어려움에서 나라를 건져내기 위해 스스로 친일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윤치호박사의 일대기를 재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려 관심을 모은다.

지난 6월 24일 윤치호박사기념사업회(이사장:김소윤) 주최로 감신대 채플실에서 열린 제1회 윤치호박사 학술세미나에서 김상태교수(서울대)는 "윤치호박사는 친일파였지만 친일파가 아니었다.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며 "그는 '객관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저버린 것이 틀림없지만 '주관적'으로는 애국자였다"고 말했다.

'윤치호일기' 내용을 중심으로 윤 박사가 친일파가 되기까지의 내면적 동기를 분석한 김 교수는 "독립보다 자강을 중시한 윤 박사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불가피한 현실로 인식하고 조선인들이 실력양성에 매진하기를 바랐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또, "기존의 친일파 연구는 누가 친일파이고 친일행적이 무엇인지 조사, 정리해 대중에게 알리는 수준에 머물러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윤리적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친일하게 되는 시대상황과 사상적 근거를 확인, 역사적 맥락에서 비판해야 한다"며 친일의 시기, 강도, 조건, 논리 등을 기준으로 친일파 범주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윤치호박사에 대한 조명도 이뤄졌다. '윤치호와 한말 기독교 선교, 위기의 시대 평신도 선교의 한 유형'을 주제로 발제한 이덕주교수(감신대)는 "그는 한말과 일제시대 교회와 일반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얼마 안되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며 "바로 이러한 지도력과 영향력 때문에 통치세력의 회유와 견제 대상이 됐고 일제시대 굴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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