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한국교회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 특집 ] 6월 특집 한국역사와 한국교회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24일(목) 09:56
고난의 땅 위에 세워진 핏빛 십자가

송인동 / 호남신대 교수

1980년 5월 광주는 기독인들에게는 처절한 신앙고백의 현장이었다. "나는 기독교 장로로서 신앙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말하겠습니다…, 추운 감방에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이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고 당신께서 갚으리라고 하시면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나는 내가 당한 수모와 광주사태로 받은 상처를 참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그들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하신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명노근 장로, 고등군사법정 최후진술)

1980년 모든 정보의 통로가 외딴 섬처럼 차단되고 왜곡된 상태에서 광주에서 일어난 처참한 비극 속에서 교회와 교인들도 함께 당한 고초는 5.18관련 기록에 조차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광주 양림동에서 열린 '양림의 오월'사진전. 이 사진전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전시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렘 10:19)라는 예레미야의 탄식처럼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비극의 현장에서 애통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와 전남ㆍ북의 1970년대 민주인권 운동의 핵심기지가 기독기관들과 교회이었기에 사전 예비검속 대상자나 사후 수배와 구속 대상자 중 기독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수습에 참여하였거나 공의를 외친 목회자들은 사태 후 신군부의 집요한 사퇴공작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참음으로 교회가 더 큰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였다.
1964년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33인이 영락교회에서 한ㆍ일회담 반대 성명을 발표한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과 교회 사이의 긴장의 서곡이었다. 그 후 에큐메니칼 운동이 국내외적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고 장차 예견되는 독재의 기미에 대처하기 위하여 통일된 증언의 필요가 대두되어 국내의 주요 기독학생 운동들이 1969년 한국기독학생총연맹으로 통합되었다.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단체와 인사들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목숨을 건 희생을 감수하며 유신독재에 항거하였다.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주요 대학 앞에 탱크가 서있던 19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으로 교수들이 연행되자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의시위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교수들은 해직당하고 많은 학생들이 제적, 실형 등을 당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대부분이 기독자교수협의회 소속인 해직교수들과 복학생들은 광주 지역 학원민주화 흐름을 선도하였고, 계엄 하 시위를 빌미로 정권찬탈을 꾀하는 신군부를 반대하여 민주 회복을 주장하는 평화시위를 밑받침하였다.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는 5월 15일과 16일의 평화시위 후 광주의 학생들은 17일은 시위를 하지 않았다. 조용한 광주에 공수부대가 진압을 명분으로 들어왔다. 18일, "설마!"라는 생각은 공수부대의 손에 젊은이들이 죽어가자 시민들의 분노로 바뀌었다.

목사도 구타하는 공수부대를 보고 항의시위에 참여한 문용동 전도사는 "누가 이 시민들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일기를 남기고 폭약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도청 무기고를 지키다 죽었다.

류동운 전도사는 "나는 이런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청에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야기는 대구 MBC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다. 김준태 시인은 5월 21일 점심 때 집 부근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공수부대의 총에 죽은 임신 8개월의 최미애씨(23세) 사연과 함께 당시 광주를 십자가로 형상화한 "아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6월 2일 전남매일에 게재, 신문은 폐간, 시인은 해직되었다.

대구출신 신학자 김정주 교수도 5월 광주를 십자가로 해석한 바 있다. 1980년 구호금을 들고 광주에 온 일본 기독인은 일본 때문에 결국 광주의 아픔도 있는 거라며 가슴 아파했다.

1980년 살벌한 계엄 치하 광야의 소리가 없던 당시 본교단 총회는 5월 17일 정부의 민주화 일정 단축 촉구를 비롯한 7개항을, 19일에는 타 교단장과 함께 대통령 면담, 위로 대표단 현지 파송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 개신교회들은 광주를 위한 기도일을 공포하고 현지에 구호금을 전달하였다. 26일 광주기독교비상구호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사망자, 부상자, 구속자를 돕기 위한 모금이 초교파적으로 진행되었다. 1980년 5월 광주 현장의 교계도 에큐메니칼 현장이었다. 기독인 재야인사들은 신교와 구교, 시민과 학생, 계엄군과 시민군을 넘나들며 평화를 부탁했다.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광주YWCA회장은 "함께 불을 꺼야한다"며 기독인 지도자들과 함께 남동성당으로 갔다.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극한상황 속에 오해로 인한 위협을 양쪽에서 받기도 하였다. "왜 우리를 팔아먹었지?"라며 뛰어 들어온 젊은이에게 제헌의원인 이성학 장로가 총구 앞에 나서서 "죽으려면 우리가 먼저 죽어. 쏘려면 쏴. 너희 앞장 안 세워!"라고 하며 가라앉혔다.

대부분이 기독인인 수습위원 17인은 26일 계엄군 재진입 소식에 평화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기로 하고 멀리 걸어 탱크 앞까지 이르렀다. 이 행진은 외신에 '죽음의 행진'으로 보도되었다. 예일대 신학부에서 수학한 김천배 선생은 아예 탱크 앞에 드러눕기도 했으나 수습위원들과 계엄사와의 담판은 실패하고 다음날 새벽 유혈 진압이 이루어졌다. 도청에 가까운 광주YWCA에 있다가 27일 새벽 목숨을 잃은 박용준 청년은 "흐느끼는 듯한 비가 내린다. 모든 걸 씻어버리려는 듯 조용히…, 신이여! 무엇이오니까? 무엇 때문이오니까?"라고 절규하였다.

피터슨 선교사(미국 남침례교)는 성조기를 차에 달고 광주 거리를 다녔으며, 교회사학자인 그는 시민을 향한 군용 헬기들의 기총소사, 공권력이 없었으나 광주는 질서가 있었고 민간재산피해가 없었다는 것 등을 증언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남편이랑 광주기독병원에 파송된 헌틀리 부인(역사가)은 세계적인 영문 뉴스지에 붉은 기를 단 차량사진이 보도되어 "좌익"이라는 말이 돌자 그 차가 기독병원에 헌혈을 돕던 차라는 사실을 그 잡지에 편지를 보내어 알렸다.

그녀는 "우리 병원만 보더라도 두 시간 안에 99명의 부상환자들과 14명의 사망자들이 들어왔다. 부상자 중에는 두 다리에 총을 맞은 9살 남자아이도 있었다"고 하였다. 광주기독병원 의료진은 당시 M16에 전쟁시에도 금지된 납탄을 사용하여 시민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총상을 입혔다는 증거물들을 촬영하여 증언하였다.

5.18 광주항쟁은 우리 근대역사의 트라우마와 분단의 현실 등이 압축되어 분출된 사건이다. 1980년 5월 교회와 기독인들은 모성의 심정으로 고난을 품고 싸매기 위해 애썼다. 산 자의 빚진 마음은 1980년대의 5.18 진상규명 운동, 인권운동, 시민운동, 통일운동 등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에너지가 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은 광주의 교회들도 초교파적으로 참여한 장대한 서사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은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를 법정에 세워 당대의 심판을 받게 하는 위업을 이루어 고난의 아시아 근현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로 아로 새기었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