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언론 위한 좋은 자료 되기를"

[ 교계 ] 양재철목사, 부친 고 양일만장로 유품 본보에 기증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0년 06월 09일(수) 10:29
   
▲ 장로교 초기 신문인 기독교보와 기독신문을 기증한 양재철선교사.
"아버지의 유품을 개인적으로 보관해오다가 이 유품이 신문자료인만큼 한국기독공보에서 보관한다면 더욱 그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총회 파송 몽골선교사 양재철목사가 지난달 27일 본보를 방문, 과거 장로교 신문이었던 기독교보와 기독신문(1937년 8월~1940년 12월분)을 기증했다. 이번 기증품은 부친 고 양일만장로(1908년~1966년)가 수집했던 자료를 대를 이어 보관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몽골에서 본국에 돌아온 양 선교사가 신문으로서의 자료적 가치를 고려해 본보에 기증한 것.
 
양 선교사가 이번에 기증한 기독교보와 기독신문은 1930~40년대 기독교 신문을 연구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될뿐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독교보(基督敎報)는 1933년 기독신보(基督申報)를 전필순목사와 같은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인물이 편집인으로 채용돼 자유주의 경향의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자 총회는 정인과목사와 홀드크로프를목사를 편집인으로 해 보수를 표방해 간행한 신문이다.
 
기독교보를 살펴보면 당시 일제치하에서 교회의 신앙이 변질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슴 아픈 기록들도 볼 수 있다. 일례로 기독교보와 기독신문에서 사용한 연도는 '소화(昭和)'로 이는 일본 히로히토(裕仁) 시대의 연호(1926~1989)다. 1939년(기록은 소화 13년) 9월 15일의 사설 제목은 '신사참배에 대하야'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등 일제치하에 굴복했던 장로교회의 굴욕적인 모습이 그대로 게재되어 있다. 1939년 8월 16일 기독신문의 1~4면의 경우에는 아예 일본어로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양 선교사는 "아버지는 순천노회 광동중앙교회에 출석하시던 평범한 장로님이셨고 애양원에서 총무과장을 지내신 분"이라며 "자료 수집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는 한국교회사기, 찬송가, 성경 등 기독교 초창기 저작들이 많았는데 지금 남은 것이 거의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끝으로 양 선교사는 "이번 기증한 자료가 한국기독공보의 발전과 한국교회 언론사를 연구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다"며 기증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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