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기쁨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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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08일(화) 16:19

나눔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우리 교단만 해도 나눔이라는 이름의 교회가 12개나 된다. 세계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선교사님들도 다 나눔의 용사들이다. 나는 10년 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데 만약에 내가 죽으면 시신을 기증해서 후학들이라도 연구의 대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나 뿐만 아니라 온 식구들이 기증 서약을 하였다. 건강을 되찾을 무렵엔 교회에 광고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밥퍼 공동체나 장기 나눔까지 실천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를 훈훈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나라는 1950년 6ㆍ25가 터졌을 때 서방 세계의 많은 나눔으로 연명을 하였고 구제를 받은 일이 있다. 받았으니 나누어 주자는 캐치프레이스를 걸고 시작한 것이 한국교회의 '선교 붐 시대'를 맞은 것이다. 오늘날의 발전된 민주주의는 진정한 나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성 싶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6장 9절에 '나눔'에 대하여 나온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사옵나이까" 제자중 하나인 안드레가 전능자에게 손을 뻗히는 모습을 본다. 지금 조건이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작정과 결단을 반드시 존종해 주시기 때문이다.

지치고 주린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큰 무리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때 주님은 제자인 빌립에게 문제를 제기하신다. 부지런히 계산을 해보니 오천명이 한 입씩 받는다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있다 할지라도 살 데도 없다는 보고를 한다.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안 되는 것만 생각하는 예가 많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앙적인 물음에 상식적인 답을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신앙이 상식으로 끝나면 거기에 알파는 없다.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 하는 삶속에서만 주님이 동행을 하신다. 서반아어에 '꼰 미고(Con migo)' '꼰 띠고(Con tigo)'는 '나와 함께' '너와 함께'라는 말이다. 믿어야 믿음이고 실행한 만큼만 믿음인 것이다. 믿는 만큼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신다. 불가능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 한다.

구조화 된 현대사회를 살면서 문제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복잡한 문제속에 답이 들었다는 것은 알지만 문제를 풀고자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왜 나눠 주질 못하느냐고 하면 "내가 가진 것이 적어서", "아름답질 못해서"라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사람은 '병든신앙'이라고 본다. 나눔의 기쁨은 두 배로 네 배로 '피보나치수열'처럼 퍼져 나갈 것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벗어나서, 눈이 건강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을 돌보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없는 이를, 물질이 있는 사람들은 물질 없어 고통당하는 이웃을 향하여 손을 펴서 나눔의 현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에 주린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 아이는 불평없이 드려서 오천명이 먹고 남음이 있었다. 헌신도 나눔도 소리 없이 해야 한다. 늘 고개 숙이면서 죄송한 마음으로 무명의 신자로 빛도 없이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고, 열 번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소유에 대한 관심보다 나눔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 교회도 행복하고 사회도 평안할 것이다. 난문제 속에 답이 들어있고 나눔속에 행복이 들어있는데 행복을 꺼집어내어 사용 할 때만 행복한 삶이라고 본다. 우리 모두 행복하자.

김춘근/목사 ㆍ 포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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