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진 목사님을 생각하며

[ 기고 ] - 스승의 날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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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26일(수) 15:38

사랑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그분이 내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분이라면 그 기쁨은 배가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임택진목사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그분이 65세로 청량리중앙교회를 조기 은퇴하시던 해로 기억된다. 신학교 동기였던 P목사의 추천으로 내가 청량리중앙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신대원 2학년 때부터였다. 불혹에 가까운 나를 신학생으로 불러주신 일과 교회가 나를 교육전도사로 받아준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고 소중한 은혜이다. 1년 반 동안 교육전도사의 일을 마치고 나는 목회현장으로 떠나왔지만 그 후에도 목사님과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님이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소식을 1년이 훨씬 지나 듣게 되었다.

자기 집을 방문한 사람을 배웅하지 못해도 결례이거늘 하물며 존경하는 분이 이 세상을 떠나가실 때 전송하지 못한 것은 비록 부음을 접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게는 늘 무거운 마음으로 남아 있다. 임 목사님은 은퇴 후에 어쩌다 한 번씩 강단에 설 때면 교회 입구에서 교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교인들의 마음이 흐트러질까, 강단 뒷문으로 조용히 내려와 사무실로 들어가셨으며 결혼 주례도 조심스럽게 사양하신 것을 보았다. 임 목사님이 집회인도 차 부산에 내려오실 때는 그가 중매한 K목사, P목사, 그리고 내게 오랜만에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면서 연락을 주셨다. 물론 점심값은 임 목사님이 내셨다.

내가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 명일동에 있는 임 목사님 댁을 방문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어떤 때는 눈치도 없이 점심식사 시간에 들러 목사님 내외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댁으로 가서 모시고 나와 점심대접을 하려고 연락을 드렸을 때였다. 전화를 받으신 목사님은 "멀리까지 들어올 것 없다"고 말씀하시고 장신대 전철역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 광장동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장신대역 만남의 장소는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목사님과 나와의 약속장소가 되었다. 함께 얘기를 나눌 때면 목사님의 화두는 언제나 한국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은 후 해가 바뀌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임 목사님을 만났을 때였다. 장신대 앞 조용한 경양식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목사님은 요즘도 많은 액수에 해당하는 봉투를 쥐여 주고 달아나듯 음식점을 나가셨다. 나는 두고 나가신 안경을 전해드리려 한참이나 목사님을 뒤좇아 가야 했다.

내가 세 번째 목회지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고 제8회 광나루 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 일이다. 나는 목사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며칠 전에 연락을 드렸었다. 한국교회백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된 시상식에 임 목사님은 불편한 몸으로 따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참석해 나를 축하해 주셔서 참으로 송구스러웠다. 임 목사님은 내가 첫 설교집을 비롯해 시집, 수필집을 출간했을 때는 꼭 친필편지로 축하와 격려의 마음을 보내주셨다. 기독공보나 다른 교계신문에 실린 내 글을 보셨을 때도 잘 읽었다면서 편지나 전화를 주시곤 했다. 언젠가는 총회 총대들에게 주어진 가방에다 목사님이 갖고 계시던 소중한 목회 자료와 신간서적을 가득 담아 주신 일도 있었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목회학 강의를 하실 때는 첫 시간에 "목회자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언제나 깨끗하고 소탈한 삶, 인생에는 부모님 같고, 목회에는 대 스승이신 목사님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한 번도 목사님에게 '존경'이란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왠지 그런 표현이 부적절한 것 같았다.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 '존경한다'는 말이 아닐까?

병석에 계실 때 오랜만에 병문안 차 목사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 임 목사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할 뿐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모님께 전화로 목사님 안부를 물었더니 목사님은 지난해 소천하시고 올해 1주기 추모문집을 교회에서 출판했다면서 책 두 권을 보내주셨다. 그러고도 두해가 흘렀다. 나의 무관심 때문일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소식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듣게 되는 것인가?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꼭 해야 할 일이 생각나도 차일피일 미루다 기회를 놓쳐버린 경우가 없지 않다. 어떤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 어떤 때는 이웃보다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도리를 다하지 못하기도 했다. 희생과 헌신을 부지런히 가르치기는 했으나 실천에는 너무도 약했던 부끄러운 모습이다.

임 목사님은 글쓰기를 좋아하셨고 글 쓰는 나를 사랑하셨다. 아니, 그것보다도 글을 쓰는 내 마음을 어여삐 보신 것이 아닐까? 아무런 의지가 없었던 것보다는 글속에 겨자씨만한 어떤 마음이라도 보였다면 그것은 훗날 그 일에 대한 변명의 거리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나는 부족함을 자위해 보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속 터놓고 인생과 목회를 얘기할 진정한 친구하나 사귀지 못하고, 25년의 목회 가운데 '내 사람(?)' 하나 두지 못한 일도 빈들처럼 허전하게 다가온다. 반환지점이 없는 하오의 길을 걸어가면서 목사님 생각이 간절하다. 임 목사님 생각을 하면 부질없는 일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나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시간들이 더욱 선명한 얼룩으로 드러나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로부터 입은 사랑의 빚은 내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누가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고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만 사랑받아 행복하고 사랑할 수 있어 즐거울 뿐이다. 스승의 날을 맞으면서 이제는 마음 놓고 불러보는 그 이름, '존경하는 임택진 목사님!'

안유환/목사ㆍ부산남노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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