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삶이 '소유'의 기준

[ 나의삶나의신앙 ] 나의삶 나의신앙-김건철장로 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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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13일(목) 11:25
동숭교회 원로장로
몽골ㆍ울란바트르 문화진흥원 명예이사장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생활은 힘들었다. 남쪽에 연고가 없어 그렇기도 했지만 북쪽에 남겨진 가족과의 기약없는 이별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 평생의 반려자이며 동역자인 아내 엄영선권사와 함께.
아버지(김능백목사님)와 나는 부산을 거쳐 제주에까지 피난을 갔다. 부산에서는 한 교회에 마련된 수용시설에서 지냈다. 누우면 몸을 비틀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매우 춥기까지 했으나 거리를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시절, 욥의 고난을 자주 묵상했다. 그러면서 고민과 불평을 떨쳐버렸다. 비록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계속되고 있음을 굳게 믿었다.

피난길에도 빠짐없이 예배를 드렸다. 고향에서의 가정예배와 마찬가지로 "예수 사랑하심은~"을 즐겨불렀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버지도, 나도 눈물 범벅이 됐다.

아버지는 피난 중에 충남 예산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 예산장로교회를 개척하셨다. 원래 북쪽에서도 사례비를 받지 않으셨는데, 예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주는 식사만으로 만족해하셨다. 아버지는 '교인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생활 원칙을 정하셨다.

이런 아버지를 교인들은 존경했다. 아버지는 1965년 당뇨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구멍난 양말을 계속해서 기워신는 것은 물론 단벌신사로 사셨다. 예산교회는 아버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기념비를 건립해 목회열정을 기리고 있다.

   
▲ '애경'에 입사했지만 회사의 부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나를 눈여겨봤던 거래처 사장이 동반 창업을 제안해 '동산유지'창업에 참여했다. 일을 즐기며 최선을 다한 결과 실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회사도 번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청렴한 삶으로 인해 자연히 나는 배를 곯았다. 그래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순교자 후손이라는 명예보다 고결한 삶을 선택한 아버지의 '큰 뜻'을 따랐다. 난 빵을 직접 만들어 거리에서 팔기도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밥값을 벌었다.

그러던 중 (주)애경 직원으로 입사해 판매 총책임자까지 올랐지만 부도가 나며 일을 접어야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애경에서 도매상 관리와 수금을 하던 나를 눈여겨봤던 거래처 사장이 동반 창업을 제안했다. 그 회사가 당시 화장비누를 제작한 (주)동산유지다. 출자금도 없었지만 졸지에 회사 창업 발기인이 됐다.

신명나게 일했다. 판매를 맡아 전국을 돌았다. 그럼에도 주일성수는 생명처럼 여겼다. 거래처를 돌며 판매를 담당하다 보니 세상 유혹에 빠질 수 있었지만 단호히 물리치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 노력했다.

이 무렵 평생의 반려자요 동역자인 아내 엄영선권사를 만났다. 거래처 여직원이었던 아내는 신앙심도 뛰어났고 성품이 따뜻했다. 아내는 실향민의 한과 아픔을 다독여주는 친구였다.
회사가 번창하며 고과가 높이 평가돼 주식의 10%를 받았다. 13년 근속을 한 후 주식을 매도하고 40세부터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주택사업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그러하셨듯 물질의 노예가 되지않고 나누면서 살기로 다짐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마침 부동산 경기가 좋아졌다. 돈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출석하던 동숭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였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복을 주실 때마다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주셨다. 그리고는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셨다.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도로 받았다.

/정리 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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