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정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 나의삶나의신앙 ] 나의삶나의신앙 - 김건철장로 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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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06일(목) 14:24
동숭교회 원로장로
몽골ㆍ울란바트르 문화진흥원 이사장

'나의 삶, 나의 신앙'을 풀어가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면서 새삼 지나간 81년 인생 여정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 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나는 외로움도 컸지만 귀한 동역자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안에서 마음의 넉넉함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물 길이 막힌 줄 알았는데,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삶의 1분 1초가, 내디뎠던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부족한 종이 감히 고백하게 된다.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셨고, 나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같이 나오게 하셨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6ㆍ25 전쟁통에 월남한 실향민으로, 가진 것 하나 없던 '김건철'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셨다. 귀한 동역자들을 끊임없이 붙여주셨고, 물질의 복을 받으면서도 욕심부리지 않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허락하셨다.

난 1929년 평안남도 강서군 누차면 산골에서 태어났다. 주변 산세가 수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농토는 비옥해 마을 자체가 부촌이었고, 특이하게도 당시 '예수님 믿는 마을'로 유명했다. 본인 또한 모태신앙이다.

마을 복음화는 개신교 선교초기 복음을 접하고 전도에 열정을 쏟으신 조부 김응록장로님의 영향이 크다. 조부께서는 고향에 보명보통학교를 설립했고, 고창교회를 세우며 당시 건축금액의 절반을 헌금했다. 또한 안창호선생님, 조만식선생님과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고, '105인 사건'의 한 명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전쟁 발발 후 공산군에 맞서다 순교했다.

조부께서는 농장을 운영하며 축적한 부를 모두 이웃에게 나누셨다. 지역사회를 위해 길을 내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남모르게 도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였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누면서 기쁨을 얻었다. 그 정신의 계승과 실천은 아버지를 거쳐 나에게까지, 또한 내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린 시절하면, '예배'부터 떠오른다. 하루도 거르지않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예수 사랑하심은~'으로 시작하는 찬송을 우리 가족은 즐겨불렀다. 예배는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2시간을 넘긴 적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간혹 지루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견고한 믿음을 갖게 한 자양분이 됐다.

아버지 김능백목사님은 북경대를 졸업한 후 조부의 권면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아버지는 방지일목사님과 평양신학교 동기동창이다. 아버지에 얽힌 일화는 후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충남 예산에서 목회하시면서 평생을 단벌신사로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겨온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조부와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신앙 안에서 가족이 화평하게 지내다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조부께서는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셨고, 아버지와 나는 국군에게 도움을 주고 공산주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기에, 급히 몸을 숨길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잠시 월남하기로 했다. 당시 누나는 이미 남한에 내려와 있었고, 어머니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1남 3녀)은 고향에 잠시 남아있기로 했다. 그 때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시며 어머니에게 건넨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잠시 갔다오리다. 그동안 몸 건강하고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그 때는 몰랐다. '잠시' 집을 나섰다 영영 생이별을 할 줄 말이다.

/정리 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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