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도 4ㆍ19는 '미완의 혁명'

[ 기고 ] 지상중계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4월 23일(금) 17:18

'젊은이들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4.19학생운동과 오늘의 학생운동)를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4월 월례 발표회에서 이덕주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가 발표한 '두 눈 부릅뜨고 다물지 못한 입-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신학적 의미' 중 '미완의 혁명 4ㆍ19' 부분을 일부 요약해서 지상중계를 통해 게재한다.


'4ㆍ19'가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는 '회개와 반성'이다. 한국교회는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4ㆍ19를 대할 수 없다.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할 것인가? 무엇보다 해방 직후 교권 분쟁에 몰두하여 자기 정화 능력을 상실함으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한 정권과 결탁하여 그 선전 도구가 되었던 과오를 회개해야 했다. 단지 같은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그 능력과 자질을 묻지 않고 정치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 후원함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집단으로 전락하여 일반사회로부터 권위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했다. 다윗 임금 앞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했던 나단과 같은 예언자적 용기를 상실하여 "나만 옳다"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배타적 독선(獨善)에서 비롯된 독단(獨斷)과 독주(獨走), 그리고 독재(獨裁)를 견제하지 못했던 실수를 반성해야 했다. 그런 반성과 회개 후에야 새롭게 전개될 역사에 창조적 참여가 가능했다.
 
회개와 반성,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기독교 신앙 가치이자 역사 속의 책임이다. 특히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들의 반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8ㆍ15 직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4ㆍ19 직후에도 한국 사회와 교회는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위기 상황을 피해가려고만 했다. 4ㆍ19 직후 1년 간 진행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상황을 빌미로 터진 군사혁명은 역사청산과 정리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군사혁명정부는 4ㆍ19 학살의 표면적 책임자들과 그들의 지시를 받고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했던 '정치 깡패'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으로 정치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자유당 독재와 타락, 부패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고 척결하는 청산작업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당 시절 권세를 누렸던 세력들은 여전히 1960년대 공화당 정권, 1970년대 유신정권, 19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권력 핵심부에서 권세를 누렸다. 그 결과 4ㆍ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상황은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타락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던 기독교계 안에서도 4ㆍ19 직후에는 청년학생과 소장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해 '예언자적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자유당 정권에 유착하여 '자유당 주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적극 활동했던 목회자와 평신도들에 대한 숙정 요구가 제기되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누가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하는 집단적 공범의식에 근거한 책임무용론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실질적으로 책임자를 문책하고 교단 지휘부를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권한'이 없는 청년학생이나 소장파 목회자들이 제기한 정풍운동의 한계는 분명했다. 여기에 1년 후 군사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면서 4ㆍ19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회개와 반성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자유당 정권과 유착 하여 정계와 교계를 넘나들며 '비신앙적'활약을 보였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196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공화당과 유신정부, 군부독재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고 각종 이권과 교계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교계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오늘 '안티 기독교운동'의 촉발 원인의 하나가 된 한국교회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은 그렇게 해서 조성되었다.
 
그 때, 회개를 했으면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 반성을 해도 완전하게 했어야 했다. 하다가 만 치료가 병을 더 악화시키듯, 그 때 하다가 만 회개와 반성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 권력지향적인 정교유착(政敎癒着)과 사회적 양심에 둔감한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대(對) 사회적, 정치적 '예언자' 기능이 약화된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체도 그 존재와 사역의 기본근거가 되어야 할 신앙의 자리를 떠나 물질적인 관심과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회 일을 해결하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급속한 물량적 성장을 이룩하여 거대한 몸집을 갖추기는 했으나 그 영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에서는 50년 전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시간적으로 21세기 글로벌시대를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당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4ㆍ19를 '미완의 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ㆍ한국교회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