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구원 위해 12萬里를 가다'

[ 특집 ] "장로교 초대 목사의 리더십을 말한다"-양전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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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22일(목) 10:21
임희국 / 장신대 교수

   
▲ 양전백목사
격헌(格軒) 양전백은 1870년 3월 10일 압록강 근처의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태어났다. 이미 15세에 시부(詩賦)에 능통했던 그는 구성군에서 서당훈장노릇을 하였다. 1892년의 어느 날, 양전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친구 김관근(金灌根)이 그를 찾아와 전도했는데 서울에서 열리는 사경회로 데려갔다. 양전백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정동교회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그때부터 서당에서 글과 성경을 겸하여 가르쳤다. 동네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여럿이 예수를 믿었고, 아마도 그 동네에 예배당은 없었던 것 같다. 김관근의 아버지 김이련(金利鍊)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학당(學堂)을 창설하여서 양전백을 훈장으로 모셨고 또 이 학당에서 예배를 드렸다(1893년). 이것이 의주 신시(新市)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양전백은 엄밀한 의미에서 여전히 유생(儒生)이었다. 그러한 그는 서양선교사가 평양 근처에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약 40리를 걸어서 그곳으로 갔다. 선교사 마포삼열(S. A. Moffett)이 거기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때 양전백이 신앙의 세계를 깨달아 알게 되었고 또 마포삼열에게 세례를 받았다. 양전백은 마포삼열을 통해 북 장로교회의 권서직(勸書職)을 받아 일했다. 선비였던 그는 언제나 책을 펴들고 논리정연하게 복음을 전했고, 신앙의 길과 이치를 조리 있게 가르쳤고 또 예배의 모범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복음전파에 열매가 맺혀서 삭주군 읍내교회가 설립되었고(1896년), 철산군 읍내교회가 설립되었다(1897년). 그리고 그는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N.C. Whittemore)의 조사가 되어 그와 동역했다. 그는 위대모와 함께 철산군 평서교회를 설립하였다(1898년). 1902년에 양전백은 선천 북교회(선천 읍교회가 이름을 바꾸었음)의 장로로 장립하였다. 그의 전도로 평안북도 많은 지역에(예, 삭주군ㆍ철산군ㆍ정주군 등)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는 이제 지역의 토착인 교회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선천읍교회에서 관서전도회를 조직했고(1900년), 교인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명신(明信)학교를 설립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양전백은 신학수업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 여전히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김석창(金錫昌), 노정관(魯晶琯) 등과 함께 신성중학교를 설립했다(1906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前身)는 1907년 6월 첫 졸업생(제 1회) 7명을 배출하였다. 1901년에 개교(開校)한지 6년 만의 결실이었다. 졸업생들은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송인서, 이기풍, 길선주, 서경조였다. 석 달 뒤(9월)에 장로교회의 독(립)노회가 성립되면서 졸업생 모두 다 목사로 장립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양전백은 노회의 파송으로 평북의 선천, 정주, 박천 등지의 교회에서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일했다. 그의 목회구역이 점차 확대되어서 초산, 위원, 강계, 자성 등지의 압록강 부근뿐만이 아니라 만주의 즙안, 통화, 회인현까지 맡게 되었다. 1909년에 그는 선천에 있는 선천읍교회(북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부임했고, 이 교회에서 그는 일생동안 교역했다. 양전백이 언제나 학교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으므로 보성여학교의 설립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사회봉사에도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그는 선천의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11년에 양전백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가 국내 반일민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합법성을 가장한 제판제도를 채용하여 조작한 대규모 한민족탄압사건이었다('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 일제는 9월 3일(음) 오전에 신성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검거했고 양전백도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된 피의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무자비한 고문을 참고 견디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심문과정에서 사망하거나(김근형, 정희순 등)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양전백은 제1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고, 제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1913년 3월에 석방되었다.

3년만에 다시 강단에서 설교하려던 그는 맨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교직(敎職)을 사(辭)하여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중통초(在監中痛楚)에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신학지남 1933.3, 31쪽).

이 고백을 듣는 교인들 모두 다 눈물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남쪽 하늘만 바라보며 목사님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던 교인들이었다.
1914년에 양전백은 평북노회의 회장이 되었고, 1916년에는 총회(제5회 총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한 감화력으로 교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한 그가 또 다시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는데, 1919년 3월의 '3ㆍ1운동'에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1월에 양전백은 선천 북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돌아왔다. 그는 3ㆍ1운동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명신학교를 재건하였다. 그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서 교회사 자료를 수집하며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머물면서 '조선장로교회사기'를 썼다(1927년). 그러다가 갑자기 병을 얻은 그는 선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약한 몸으로 계속 선천 북교회를 목회하던 그는 1933년 1월 17일에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40년 동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긴 양전백은 3천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일평생동안 전도여행한 거리가 12만여 리에 달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박영신과 2남(윤모 윤직) 4녀(윤성 윤정 윤숙 윤도)가 있었고, 장례는 선천 기독교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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