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1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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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9일(금) 09:46

월-그는 내 심복이라
본문: 몬 1:8-12
찬송가:559장(구 305장)

빌레몬은 사도바울의 제자였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모든 것을 마땅히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했다. 마땅한 일도 사랑이 아니면 명령하지 않았다. 그렇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사랑으로써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갈 5:6)"이라고 했다. 우리가 마땅히 명령할 수 있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믿음에 효력이 없다. 누군가에게 마땅한 일로 명령했지만 고치지 않는다. 효력이 없다. 왜일까? 사랑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10절에 보면,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오네시모는 원래 노예였다. 12절에서는 "내 심복이라"고 했다. 본뜻은 '내 심장'이다. 사도바울이 고대사회에서 노예를 '아들, 심장'이라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의 돈을 훔쳐 로마까지 왔다. 그런데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난 것이다. 바울은 그를 복음으로 낳아 아들이 되게 했다. 오네시모란 이름은 '유익한 사람'이란 뜻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유익한 사람이 된다.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다. 복음과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이들을 그렇게 멋지게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롬8:28)

오늘의 기도

마땅한 일도 명령하기보다, 사랑으로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사랑으로써 말하며, 덕을 세우게 하옵소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 용 섭 목사
가락동교회 시무


 

화-바벨론에 관하여
본문: 사 14:21-27
찬송가: 505장(구 268장)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이 먼저 나온 후 이어서 주변 나라들에 대한 말씀들이 나온다. 이것은 중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선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비롯한 블레셋, 모압, 다메섹, 애굽 같은 열강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느 나라도 하나님의 손길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은혜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바벨론을 주관하신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를 제패하던 패권 국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의 멸망을 선고한다. 마치 빗자루로 청소하듯이 바벨론을 쓸어버리고 들짐승의 거처를 삼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바벨론은 죄악과 강포가 가득한 나라였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죄악이 관영하면 멸망한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께서 저울에 달아보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둘째, 하나님의 경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24절부터 '하나님의 경영'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등장한다. 경영이라면 치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다루시는 것은 바로 경영에 속한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을 담고 있다. 특별히 19장에 애굽을 심판하실 때 그들을 치시고는 고쳐주셔서 하나님의 복된 백성을 만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해 나가는 것도 성경을 연구하는 기쁨이 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영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열방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현 진 목사
초읍교회 시무


 

수-내 발의 등이요
본문: 시 119:105
찬송가: 510장(구 276장)

비행기 조종사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버티고(vertigo)현상이라고 한다. 버티고 현상이란 깜깜한 밤이나 구름 속에서 전투기가 뒤집혀 날아가는지 정상적으로 날아가는지 혼동이 일어나는 '공간 정위 상실'현상을 말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종종 인체 평형관이 잘못된 인지를 하게 되고 종종 대형 사고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해상을 비행할 때나 야간 비행 시에는 항공기의 위치를 참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어 비행시 별빛과 해상의 선박 불빛이 동일하게 보이는 비행 착각도 발생하기 쉽다고 한다. 이러한 비행착각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착실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과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계기판을 믿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환경의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른다. 그럴 때 우리의 느낌에 따라 살다보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진리에 기초한 성경말씀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길에 빛이라"고 했다.
 
세상은 숨가쁘게 돌아간다. 방송을 볼 때마다 급변하는 혼란 속에서 우리는 늘 버티고(vertigo) 현상을 느끼게 된다. 다 끝난 것 같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것 같은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겁내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하는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에서 말씀을 주시고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진리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 요 셉 목사
시화염광교회 시무


목-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문: 빌 1:12-18
찬송가: 545장(구 344장)

히브리어로 눈을 '아인'이라 한다. 본래 의미는 '샘'인데, 경우에 따라 축복의 샘도 저주나 불행의 샘도 뜻한다. 즉, 보는 관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위대한 삶은 위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에 의해 발견되고 구비되며 이루어진다. 남들은 실패라고 하지만, 관점에 따라 승리, 혹은 감사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우리 가정에도 갖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문 12절에서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씀하였다. 감옥에서도 바울 사도는 기뻐하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사건과 조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바울은 자신의 처한 상황을 자기중심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러니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섰다 해도 이로 인해 복음전파의 경로가 확장되었음을 기뻐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적 절망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의 감격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를 뛰어넘는 위대한 기도를 하기 원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우리의 관점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되면,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보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믿사오며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길 홍 목사
반포교회 시무


금-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법
본문: 잠 15:1-4
찬송가: 220장(구 278장)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의 의사소통 방식이 있다. 동식물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아주 적은 비율만 가지고도 충분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다른 단어와 문법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많은 단어와 표현방법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들과 더 소통이 잘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점점 이웃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거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본래 대화가 가능한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인간에게조차 일방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항상 인간의 상황을 살피고 인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배려하실 때 인간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의지가 가장 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실 때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을 주셨다. 하늘의 언어와 문자는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문자가 아니라 우리가 읽고 쓸 수 있는 언어였다. 이외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오늘날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셨듯, 우리가 남과 대화하려 할 때, 상대에 따라 눈높이를 맞추어 얼마만큼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느냐에 따라서 말하는 자도 살고 듣는 자도 살아나며,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도, 이웃들의 소리에도 귀를 닫고 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언어의 절제와 금식을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 종 찬 목사
고창중앙교회 시무


토-잔치가 있는 삶
본문: 요 2:1-11
찬송가: 588장(구 307장)

베네딕트 수도원의 안젤름 신부는 유명한 작가이자 강사이다. 그는 책의 인세와 강연으로 들어오는 많은 수입을 모두 수도원에 내어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낡은 중고 자동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약하다. 안젤름 신부의 인터뷰에서 "강연하고 돌아오는 길에 때로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는 작은 사치를 누린다"고 하는 것을 듣고는 퀴스텐마허는 "맞다. 작은 즐거움을 누리지 않고는 청빈, 정결, 순명의 서약을 견디기가 어려울 거야!"라며 무릎을 치고, '럭셔리 예수'라는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퀴스텐마허는 틀에 박힌 삶과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어서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 럭셔리라고 정의를 내리며 예수님이 바로 이런 럭셔리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말한다.
 
가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피로연이 시작된다.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로 웃음꽃이 만발한다. 비록 로마의 지배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지만 오늘만은 행복감으로 충만하다. 예수님은 모처럼만의 행복한 시간이 깨어지지 않도록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다. 퀴스텐마허는 갈릴리 가나의 이적을 전형적으로 '럭셔리한 예수'의 삶의 한 일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적한 문제로 인해 비록 삶이 고달파도 잔치를 즐길 여유가 있어야 한다. 퀴스텐마허는 물질에 대하여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것을 예수님의 럭셔리라고 말한다. 돈에 대해 초연한 사람만이 잔치를 즐길 수 있다. 이웃을 위해 잔치를 베풀자. 예수님은 천국을 잔치로 비유하셨다. 예배 또한 구원의 축하 잔치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넉넉히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때에 따라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삶이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잔치가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 대 석 목사
일산소망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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