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안의 나무

[ 제11회 기독신춘문예 ] 제11회 기독신춘문예 희곡 부문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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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8일(목) 14:13

글 : 이정희 그림 : 최현정 

등장인물
 김경이(20대 중반) / 한철호(20대 후반) / 철호부 / 철호모 / 경이할머니 / 경이부 / 경이모/ 강경댁 / 동네부인/ 어린경이(7세)/ 언니목소리/ 남자목소리  

 

무대
무대의 왼편에는 '강경슈퍼'라는 간판이 있고 그 앞에 평상이 놓여 있다.
무대의 가운데에는 초라한 시골집인 철호의 집이다, 문을 열면 안방이다.
무대의 오른쪽 끝 부분에 버스 정류소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것을 기본 무대로 하되 경이의 과거 회상 부분에서는 특별한 배경 설치 없이 인물과 연기, 조명 등으로 연출한다.

사거리 강경슈퍼 앞에는 평상이 놓여있고 동네 부인과 슈퍼주인 강경댁이 채소를 다듬으며 잡담을 하고 있다.
바지차림이지만 임산부임이 역력한 경이가 버스 정류소 앞에 간단한 가방을 들고 서 있다. 평상의 사람들을 보고 다가온다.

강경댁 (동네부인과 함께 시선을 경이에게) 누구여?
동네부인 몰러, 첨보는 새댁인디.

가까이 다가서는 경이.

   
경이 저 말씀 좀 여쭤 볼께요. 혹시 한철호 씨 댁 아세요? 여기쯤이라고 했는데….
강경댁 (동네부인을 보며) 철호? 아, 저 꼭대기 집 아들?
동네부인 이 그려, 창수 아자씨 아드을. 서울로 기술 배우러 갔다가 며칠 전에 아 주 내려 왔다더만… (경이에게) 근디 그 집 찾어 온 규?
경이 예, 아시면 좀 가르쳐 주세요.
강경댁 (여전히 '누군고?'하는 표정으로 철호의 집을 가리키며) 저어기 저 꼭대기 기와집 보이지유? 이 길로 쭉 올라가면 그 집유. 근디 누구시랴아?
경이 (질문을 회피하며) 예, 고맙습니다.

 두 사람, 뒤돌아서 가는 경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동네부인 누구랴아, 배가 솔찬이 불렀는디… 철호를 찾는 거 봉게 암만혀두….
강경댁 (의심스러운 눈빛) 이 그려, 그런 거 같은디.

암전.

철호네 안방, 철호모가 빨래 몇 개를 개고 있고 철호부는 옆에 앉아 있다.
철호가 쫄밋거리며 들어온다.

철호 엄마
철호모 (투박한 말투) 왜 그랴?
철호 (엉거주춤하며 멀찍이 앉더니 부모 눈치를 살짝 보며) 저기… 오늘 좀 있으면 서울에서 누가 올 거여요.
철호모 (빨래 개던 것을 멈추며) 서울? 서울서 누가 온댜? 너 서울 작은 아버지 정비소 일할 때 알던 사람여?
철호 (쫄밋) 예…
철호모 누군디 다 저녁 때 온다냐? 저녁 먹으야것네?
철호 예…
철호모 저녁 먹고 오늘 간댜?

철호부는 물끄러미 보며 듣고 있다.

철호 (제 발을 만지작거리다가) 저기이… 살러오는 거여요.

철호부모가 어리둥절할 때 밖에서 부르는 소리.

경이 철호씨이. 철호씨이.
철호 (재빨리 맨 발로 뛰어나가 경이 손을 잡고) 왔어? 집 잘 찾았어? 힘들었지?

철호모, 재빨리 나오고 아버지는 뒤따라 나온다.
경이가 말없이 꾸벅 인사를 한다.

암전.

철호네 안방에 경이, 철호, 부모 둘러 앉아있다.

철호모 (황당해서 철호를 꾸짖으며) 이놈아 이게 뭔 일여? 얌전도 열두 가지, 똑똑도 열두 가지라더니 생전 말썽 한번 안 피우던 놈이 대체 이게 무슨 일여? 아이구 주여 아부지, 애는 또 언제 만들었댜? (경이를 보며 조금 살갑게) 그래, 아주 살러 온겨?
경이 네에….
철호부 (묵묵히 있다가 경이의 대답이 떨어지자 바로 아내를 향해 느긋한 목소 리로) 아 뭐혀, 저녁 안 혀? 어이 나가봐아.
철호모 (철호를 주먹으로 쥐어박을 듯하며 나간다) 으이구 이놈아, 으이구 으이구.
철호부 (경이를 찬찬히 보며) 그래, 이름이 뭐여?
경이 김경이에요.
철호부 으음… 그럼 부모님은?
철호 (나서며) 저, 아버지는 서울에서 혼자 사시고요. 언니 둘이 있는데 다 결혼해서 잘들 살아요. 경이가 셋째 딸이고 막내에요.
철호부 (경이에게) 어머니는 돌아가셨는가?
경이 아니요, 저 어릴 때 헤어졌어요.
철호부 부모님이 이혼하셨는가?
경이 (고개만 숙이고 곤란한 듯 묵묵부답)
철호부 (바로 질문을 거두며) 애는 날 달이 언제여?
경이 5월이에요.

철호부의 너그러운 표정과 철호의 멋쩍으면서도 좋아하는 표정.

암전.

스웨터를 입은 철호모가 추운 듯이 팔짱을 끼고 촘촘히 뛰어 슈퍼로 들어온다.

철호모 강경댁, 부침가루하고 당면 있는감?
강경댁 예, 아즈메. 있지유. (꺼내 봉투에 담아주며) 부침개하고 잡채 해 드실라 고유? (눈치를 살짝 보며) 집에 귀한 손님 오셨나보네.
철호모 아, 시끄러 돈이나 받어

계산을 주고받으며,

강경댁 어제 저녁 나절에 왠 이쁜 새댁이 철호를 찾더만 (목소리 줄이며 능청맞게) 철호 샥시 맞지유?
철호모 (퉁명스럽지만 싫지 않은 듯) 그 놈의 자식이 그냥 사고를 쳤나벼. 지난 봄에 서울 작은 아버지 자동차 정비소에서 정비 기술 배운다고 가더니만 그 때 만났다는디 여태 말도 안하다가 인제 내려오라고 했댜.
강경댁 (호들갑) 오메, 그랬구먼. 그럼 서울 샥시네유? 어이구 아즈메 좋으시것네. 우리 동네에도 서울 아가씨가 시집왔으니 동네 경사네유 경사…(호호 웃음).
철호모 경사는 무슨, 동네 챙피해 죽것어. 혼례도 하기 전에 배가 불러서는….
강경댁 아즈메, 요새 결혼 전에 배 부른 게 무슨 흠이라구유. 그나저나 몇 개월 이래유?
철호모 여섯 달이나 됐댜.
강경댁 그 쯤 되보이 더라구유. 그럼 결혼식을 서둘러야 것네유. 안 그러면 애기 낳고 해야 하는데 애기 낳고 나면 쉽지 않더라구유. 우리 뒷집 선희 엄마 봐유. 애기 낳고 한다더니 금새 선희 동생 생기고, 둘째 낳고 나니께 애들 키우느라고 정신없어서 아직도 못하고 있잖아유. 선희가 지금 몇 살이더라… 올봄에 유치원 간다던디….

암전.

철호네 집 안방에서 철호 부모와 철호, 경이가 과일을 먹고 있다.

철호모 (경이에게 슬그머니) 야, 아가.
경이 네
철호모 어쨌거나 니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니 우리도 한번 만나봐야 하지 않것냐? 명색이 사둔인디… 배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은 어째야 하는지 상의도 해야것고….
철호 그래, 나도 자기네 식구 한 사람도 못 봤잖아. 이제라도 만나서 상견례 해야지. 언제쯤 할까?
철호모 여기 촌에까지 오시라기는 좀 그렁게 우리가 서울로 가도되고 아니면 중간에 어디서 만나도 되지 않것냐?
철호 응! 그럼 좋겠네. 중간 어디쯤이 좋지? 청주? 천안? 근데 자기 언니들은 경기도 어디서 산다고 했지? 언니들까지 다 만나기는 어려울까? 시간이 맞아야잖아.
경이 (곤란한 표정) 저어…… 그게 저…….
철호 왜? 자기 임신하거 때문에? 아직 말씀 못 드렸어?
경이 그게 아니고…….
철호 그럼 뭐?
경이 (고개만 숙이고 묵묵부답)
철호 (답답해하며) 그럼 뭔데? 말을 해봐. 결혼식 안 할거야? 자기, 식구들한테 무슨 죄졌어? 왜 그래?

경이, 울음을 참으며 일어나 나간다.

암전.

경이가 무대의 어두운 한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있다.
조명이 무대 중앙의 인물들에게 집중되면서 경이의 과거 회상들이 이어서 펼쳐진다.

일곱 살짜리 어린 경이가 울고 서 있고 할머니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 경이의 엄마는 일부러 상황을 외면하듯 마당비를 들고 한쪽을 쓸고 있다.

할머니 경이야 이년아, 울긴 왜 울어? 누가 뭐랬다고 울어? 니 년이 울면 집안에 재수가 없다고 했어 안 했어? 누가 때리기를 했냐? 밥을 안 줬냐? 왜 눈만 뜨면 울고 지랄이야? 시끄러워! 그만 그치지 못해! (옆에 있는 매를 든다) 당장 안 그쳐? 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년!

할머니가 매를 들자 지레 겁을 먹은 경이가 마당에 풀석 주저앉아 더 서럽게 울며 엄마 얼굴을 올려다 본다.
경이모, 경이를 외면하고 빨랫감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할머니 (나가는 경이 엄마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며) 에미 년이나 딸년이나 우리집 대 끊어 놓는 재수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남의 집 3대독자한테 시집 왔으면 아들을 낳아야지 아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년들만 줄줄이 퍼질러 놓고도 뻔뻔스럽게 밥이 입에 들어가더냐? (주저앉은 경이를 향해) 이년! 명도 질긴 년! 한 겨울에 나서 윗목에 밀어놔도 안 죽고 살 더니만 점쟁이 말이 딱 맞았어. 니 년 기가 드세서 남동생이 생겨도 제 명대로 못 살 거라더니 내 귀하디귀한 손자가 나면서 죽었다 이년아! 아이구 원통해라 (경이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며) 내 손자 잡아먹은 년 이 년! 니 년 팔자가 내 손자 죽였어 이 년아!
어린경이 (겁에 질려 울며 엄마가 나간 곳을 바라본다) 엄마…엄마….
경이부 (어디선가 뛰어나와) 시끄러! 니 에미는 뭐 하러 불러! 딸년들이나 에미나 집 안 시끄럽게 하는 것들! 에이! (휙 밖으로 나간다)

암전.
이어지는 경이의 회상.

경이모가 마당 구석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손을 합장하고 서서 빌고 있다.

경이모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3대독자 대 끊어지지 않게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이 년이 박복해서 아들 하나 주신 것 나면서 죽어 버렸습니다. 죄 많은 이년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 하나 내려 주시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린 경이가 구석에 숨어서 보고 있다. 경이모가 인기척을 느끼고 경이를 본다.

경이모 (신경질적이고 엄하게) 경이 너 거기서 뭐해? 저리 안 가?
어린경이 엄마….
경이모 저 쪽에 가 있어 어서! 너 때문에 우리 집에 아들이 없다는데 부정타면 어쩌려고 그래? 어서 저리 가 어서!

암전.
경이의 회상이 이어진다.

경이부모의 부부 싸움, 어두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듣고 있는 어린 경이.

경이모 (몸부림) 나라고 아들이 싫어서 딸만 낳은 줄 알아요? 겨우 아들 하나 낳은 게 죽어서 나왔으니 내 심정은 어떻겠어요? 3대독자 집에 시집와서 아들 하나 못 낳아준 내 심정 당신이 알기나 해요? 죽고 싶다구요?
경이부 차라리 죽어! 지금 내가 첩이라도 들일까봐 이 야단이야? 아니, 내가 첩을 들인다 한들 니가 할 말이 있어? 그나마 밖에서라도 아들 하나 낳아 데리고 오면 너는 나한테 고맙다고 절해야 돼. 지금이라도 내가 맘만 먹으면 아들 낳아 줄 여자가 줄을 섰어. 알았어?
경이모 그래서요? 당신 바람피우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벌써부터 알았지만 참았다구요. 당신이 아들 핑계로 이 여자 저 여자… (단호하게) 더러워요! 만일 당신이 다른데서 아들이라도 낳아 데려온다면 난 그 날로 집 나갈 거에요.
경이부 뭐야? 이 년! 이 잘난 년 좀 보게. (폭행) 니가 지금 남편한테 훈계냐? 협박이냐? 오냐오냐하니까 니가 나를 발바닥 때로 여긴다 이거지? 뭐가 어쩌고 어째? 집 나갈 거에요? 나가! 이 년아. 당장 나가! 니가 싸질러 논 딸년들 다 데리고 당장 나가라고!

경이모가 서럽고 한 맺힌 울음을 울고, 어린경이가 귀를 막고 소리 없이 흐느낀다.

암전.
이어지는 어린경이의 회상.

경이부 어머니! 이 여편네가 집을 나갔어요. 어젯밤에 보따리 싸서 집을 나갔다 구요.
할머니 집을 나갔다구? (주변을 둘러보고) 이런 벼락 맞을 년. 그동안 먹여 살려 준 은공도 모르고 집을 나가? 에비야, 그런 년 집에 있어봐야 우리 가문 대도 못 잇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니가 재산이 없냐? 인물이 못났냐? 새 장가를 가도 열 두 번이라도 더 갈 수 있으니 그 깟 년 내쫓은 셈 쳐라.

어린경이 (한쪽에서 쭈그리고 소리도 못내고 흐느낀다) 엄마…엄마….

암전.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조명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경이에게 집중되고 술에 취해 주정하는 경이부의 목소리가 회상으로 울려 퍼진다.

경이부목소리 (취해서) 너 또 예배당에 가서 피아논가 뭔가 치고 오는 거지? 애비가 피아노 그 딴거 배우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니가 딴따라야? 그깐건 배워서 뭐한다고 애비 말 안 들어 응? 기집애가 살림이나 하다 시집가면 그만이지. 니 언니들은 중학교만 나왔어도 벌써 나가서 지들 밥벌이 하는데 너는 고등학교까지 보내 주는 것도 감지덕지 해! 너 애비 말 안 듣고 딴따라 짓 하고 다니면 내쫓아 버릴테니 그리 알아! 니 언니들은 안 그런데 경이 네 년은 꼭 니 에미를 닮았어. 기생도 아닌게 노랫가락이라면 환장을 했지… 넌 꼭 네 에미를 닮았어 꼭….

무대가 밝아지고,
대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경이에게 다가와 옆에 앉는 철호.

철호 울었어?
경이 (눈물을 닦으며) 아아니…. 철호씨!
철호 응?
경이 내가 철호씨 처음 본 게 언젠지 알아?
철호 당연하지. 자기 비 오는 날 차 정비하러 왔을 때잖아. 시간 많이 걸리니까 볼 일 보고 오라고 했더니 괜찮다고 서 있길래 내가 사무실로 데려고 가서 커피까지 타 줬지.
경이 (미소 띄우며) 그 날 나 어땠어?
철호 음…. 말이 별로 없고 그래서인지 대하기가 좀 어려웠어. 얼굴이 어둡고 그늘이 있어 보였지.
경이 그래, 그랬어. 그런데도 철호씬 참 상냥하게 날 대해줬고…. 근데 철호 씨, 난 그 날 철호씨 처음 본 거 아니었어.
철호 (깜짝) 응? 정말?
경이 응, 나 자취하던 집이 그 정비소하고 가깝잖아. 어느 날 퇴근길에 차 맡기려고 정비소에 갔는데 정비소 사장님 댁 꼬맹이 아들 둘이 '삼촌 삼촌'하며 어느 직원을 귀찮게 따라다니더라고. 어찌나 개구쟁이들인지 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거슬릴 정도인데 그 직원은 짜증도 안내고 함께 장난도 쳐 주고 그러는 거야.
철호 (웃으며) 그 녀석들 내 조카들이니까 귀여워서 그랬지.
경이 그래,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철호씨 친 조카들이었어. 그걸 보는 내 가슴이 저려왔어.
철호 (장난기있게) 그래? 그래서 비 오는 날 일부러 날 유혹한거야?
경이 유혹? 어떻게 내가…… 난 내가 누군가의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았는걸. 재 수없는 애, 팔자 드센 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애,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런 애였거든. 사무실에서 철호씨가 타 준 커피를 마실 때도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그 이상의 생각은 할 수도 없었어. 그런데 그 날 이후 날 볼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 주는 철호씨를 보면 얼음 같던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 철호 (기분좋은 장난기로) 으음, 난 그 얼음 공주를 녹여 주고 싶었거든 하하하. (진지하게) 난 우리가 만난 지난 가을부터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야. 언젠가는 내게도 좋은 사람이 생길 거라고 믿었었지만 그게 바로 자기인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경이 나처럼 어둡고 그늘진 여자가?
철호 응, 좋아. 이 예쁘고 착한 얼굴과 함께 자기의 슬프고 서러운 속사람까지 모두 다 사랑해.
경이 (목이 메이며) 나 사실 아버지와 연락 안하고 살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 떠난 후로 한번도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않았어. 언니들 통해 소식은 조금씩 듣지만 남보다 못해. 어린 내가 이유도 모르는 채 받았던 미움과 증오를 내 평생,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어. 그래서 상견례 못해. 결혼식 해도 언니들한테만 연락할 거야.
철호 (너그러운 이해) 그래 그랬구나. 괜찮아 걱정마. 난 항상 자기편이야 자기가 원하면 그렇게 해.
경이 고마워 철호씨. 철호씨, 난 우리 아기 잘 키울거야. 상처주지 않고 사랑으로 키울거야. 어두운 구석에 앉아 혼자 우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할 거 야.
철호 (너그럽고 다정하게) 그래.

암전.

철호 집 마당.
 
철호모 야 아가.
경이 네
철호모 오늘이 읍내 장날여. 가서 장 쪼매 보고 와야것다. 너 뭐 필요한건 없냐?
경이 전 없어요. 다녀오세요 (쫄밋거리다가) 저어… 어제 죄송했어요. 말씀하시는데 나가버려서….
철호모 (투박하지만 정이 깃든 태도) 아니다. 너도 사정이 있잖것냐? 결혼식 하고픈 마음은 나보다도 니들이 더할틴디… 괜찮응게 형편대로하자. 괜한 걱정말고… 다녀오마.
경이 (따뜻한 이해가 고맙다) 네에….
철호모 (집을 나서며 경이와 멀어지자 혼잣말로) 잡것, 집에 들어 온지가 벌써 며칠이 됐구먼 아버지 어머니 소리 한번을 안 허네.

슈퍼 평상에서 강경댁과 동네부인이 수다를 떨고 있다가 지나가는 철호 모를 끌고 간다.

동네부인 성님! 여기 좀 앉어 보슈. 엊그제 성님네 집에 온 샥시 말유. 그 샥시 때문이 온 동네 뉴스랑게요. 배가 이만한 샥시가 철호를 찾어 왔는디 과연 그게 누군고오 하면서….
철호모 (말을 자르며) 남 말들은…. 그려, 우리 철호 샥시여. 남들은 촌에서 장가도 못가 걱정인디 그 놈이 손주까지 데려와서 효도 혔어.
동네부인 효도도 효도 나름이지유. 요즘이 어떤 세상인디 서울서 이 촌구석까지 왔대유? 젊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서울로 못가서 안달인디.
철호모 왜? 서울서는 촌으로 시집오지 말라는 법 있는 감? 지들끼리 좋아하다보면 촌으로 와서 살 수도 있는 일이지.
동네부인 오메, 나두 들은 말이 있어 그러지유.
철호모 무슨 말을 들었는디?
동네부인 아 글쎄 서울서 다방이나 술집아가씨 였는지 아니면 부모 없는 고안지 아니면 빚져서 도망 왔는지 그런거 아니냐고 수군대더랑게유.
강경댁 (철호모의 눈치를 보며 동네부인에게 핀잔) 으이구 별소리 다 하네. 누가 그려? 알지도 못하면서 참말로 입방정이랑께.
동네부인 지가유, 남의 말이라고 함부로 하는 건 아닌디유. 젊은 여자가 배불러서 왔으니 좀 말이 많것어유? 성님두 너무 믿지만 말고….
철호모 (버럭 화내며) 그 놈에 주둥이들을 그냥 확! 그려! 내 며느리 배불러서 왔다 어쩔래? 누구든지 흠 없는 놈 있으면 나와 보랴. 젊은 애들이 혼인 전에 애부터 가졌기로서니 알지도 못하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녀! 뭐? 술집? 다방? 어떤 주둥인지 내가 알면 가만 안 둘껴. 잘났거나 못났거나 며느리도 내 새끼고 뱃속에 애도 우리 새끼여. 다시 한번만 그런 소리 들려봐라! 나갈텨!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동네부인 아니, 성님 그게 아니구….

 암전.

경이와 큰언니의 전화 통화 중.
경이는 수화기를 들고 있고, 큰 언니는 목소리로 연출.
어두운 무대에서 경이에게만 조명을 비춘다.

경이 응 언니, 난 잘 지내. 언니랑 작은 언니는?
목소리 우리도 여전해. 근데 경이야, 아직도 아버지 한번 만날 마음 없니? 많이 늙으셨어.
경이 (경직) 아니!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잖아.

철호모가 무대의 어두운 뒷쪽으로 등장하며 전화 통화 내용을 듣는다.

목소리 너도 이젠 결혼도 해야 하고 아기도 낳을 텐데.
경이 (말을 자르며) 내가 결혼을 하든 아기를 낳든 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야?
목소리 경이야, 사실 너 집 나와서 야간 대학에서 피아노 공부할 때 학비랑 생활비 언니들이 대 준거 아니. 언니들이 주는 거라고 하라면서 모두 아버지가 주셨던거야. 그리고 너 자취하던 집에도 여러 번 다녀가셨고 네가 피아노 가르치던 학원도 어딘지 물어보기도 하셨어. 네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으니까 (사이) 워낙 네게 많은 상처를 주셨으니까… 그래서인지 차마 네게 가까이 못하고 사셨어. 하지만 말없이 네 걱정 네 생각 하시는 게 보인다. 부모마음이 그런 거 아니겠니?
경이 (비웃음과 분노의 폭발, 그리고 점점 더 오열하며) 마음? 부모마음? (크게 웃는다) 그게 뭐야? 먹는거야? 입는거야? 그게 뭔데 언니. 우리 아버지란 사람한테 마음이란 게 있는 줄은 몰랐네. 죽으라고 윗목에 밀어놓은 핏덩이가 살았다면서 미워하고 증오하고 구박하며 키운 딸자식에게도 부모 마음 이란게 있는 거야? 어린 자식 떼놓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집 나간 엄마에게도 부모 마음이란 게 있어? 그 어린 것을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상처와 아픔 속에 울게 해 놓고 학비? 생활비? 그게 무슨 보상이라도 된다는 거냐구? 언니, 난 마음이 뭔지 몰라, 마음을 받아보지 못해서 몰라. 내 마음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서 몰라. 마음은 어떻게 받고 어떻게 주는 건지 해보지 않아서 몰라. 마음은…늘 아프기만 한 거란 거 밖에 몰라. 마음속엔 슬픔이 들어 있다는 거밖엔 몰라…(서러운 오열)

뒤쪽 어둠 속에서 듣고 있던 철호모가 경이에게 다가와 가여운 듯이 서럽게 우는 경이를 감싸 안아준다.

암전.

코믹한 연기가 요구되는 한 대목.
강경슈퍼 앞 평상으로 거만하게 걸어오는 철호모.

철호모 강경댁! 동네부인! 다 모여! 느그들 오늘 다 디지스 (디졌어).
두사람 (무슨 일이냐는 듯 집합하고 한 목소리로) 무슨 일 이유?
철호모 이, 나가(내가) 할 말 쪼깨 있구먼.
두사람 뭔디유?
철호모 우리 철호 샥시 말여. 엊저녁이 식구들 다 앉은 자리서 이러구 저러구 지 살아온 야기들을 털어 놓더만. 근디 말여, 난 참말로 갸가 그런 줄은 몰랐당게.
동네부인 오메 성님, 그러문 참말로 다방 아가씨?

철호모, 눈을 지그시 내려 깔고 고개만 살레살레.

강경댁 그럼 설마 술 집? 오메 웬일이랴.

철호모 여전히 같은 반응

동네부인 오메 오메, 그럼 빚쟁이 피해서 왔구먼. 그러니께 성님, 내가 뭐랬슈? 무조건 믿지 말라고 혔슈? 안 혔슈?
철호모 (동네부인 말을 딱 자르며) 되앗고! 자네들 거 피아노 선상님이라고 아는가?
두사람 피아노 선상님?
철호모 (거드럼) 이이, 우리 며늘아가 서울서 아그들 피아노 가르치는 선상님였다는디 자네들이 원채 촌에서만 살어서 그런거 아는가 모르것네. 그려두 들어는 봤재?
강경댁 아즈메, 철호 샥시가 정말 서울서 피아노 선생님였대유?
철호모 이이. 그 뿐 아녀. 여기 자네들 중에 대핵교 문턱 귀경혀 본 사람 손 좀 들어봐. 우리 며늘아는 대핵교까지 댕겼댜. 근디두 우리 철호가 맴씨가 하두 좋아서 예까지 살러 왔다는겨. 고등핵교만 댕겼어두 아무렇지도 않구 좋기만하댜아.

잠시 두 사람의 호들갑 떠는 모습과 거드럼을 피우는 철호모의 얼굴.

동네부인 오메, 그럼 우리 동네 애들이 신세 좀 지것네유. 당장 우리 손녀 딸두 피아노 좀 가르쳐 달라고 좀 해 줘유. 성님. 헤헤헤.
강경댁 그 뿐여유? 우리 교회 피아노 반주도 좀 해 주면 좋겄네에. 호호호.
철호모 그런걸랑 찬찬히 야그허고 인자 우리 며늘아 가지구 입방아들 찌면 알재? 꺼벙혀두 순사여. 까불지들 말랑게.
동네부인 성님두 참, 까불긴유…. 성님네 생각혀서 쪼매 걱정 헌거지유.
철호모 이삼은 육이나, 삼이는 육이나!

그 때 경이가 슈퍼 쪽으로 온다.

동네부인 오메, 저기 피아노 선상님 오시네. 헤헤헤.
경이 (가까이 와서 철호모에게) 저어 어머니.
철호모 (어머니란 말에 화들짝 놀란 듯) 이? 그려 아가, 왜 나왔냐?
경이 (지갑을 건네며) 가게 가시면서 지갑을 두거 가셨길래요.
철호모 (후딱 받아들며) 오메, 내가 정신없다.
동네부인 (놀리듯)으이구 성님, 내 정신은 무슨… 성님이 물건 사러 왔슈? 며느리 자랑하러 왔잖유.
철호모 이 사람이!

 한바탕 웃으며 암전.

철호모와 경이가 집을 향하고 버스 정류소 쪽에서 철호부가 종이 가방을 쥔 채 자전거를 끌고 들어오다가 집 앞에서 만난다.

철호모 그새 어디 댕겨와유? 그 가방은 뭐유? (받으려한다)
철호부 (가방을 경이에게 건네며) 야 거여. 아가, 이거 한 번 봐라.
경이 (가방을 받아 옷을 하나 꺼내 든다. 임신복이다. 깜짝 놀란다.)
철모호 임신복 아녀? 이거 당신이 사온 거유?
철호부 배가 솔찬이 불렀는디 편하게 입어야지. 어뗘, 맘에 드냐?
경이 (목이메며) 네에, 마음에 들어요.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철호모 (기분 좋아서) 영감두 참, 기왕 사 오는 거 하나 더 사오지 그랬슈. 갈어 입을건 있으야지.
철호부 그려? 그러네 참. 허허허 다음 장날 가서 하나 더 사지 뭐. 아가 다음 장에 같이 나가서 하나 더 사자. 이쁜 것두 많더라 허허허.

이 때 철호가 급히 뛰어 들어와 경이 손을 잡고 버스 정류소 쪽으로 끌고 가며.

철호 자기야, 빨리 이리 와 봐. 빨리.
경이 (이끌려 가며) 왜 그래 철호씨.

철호 부모도 놀라 뒤 따라 간다.
버스 정류소 표지판 앞에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백발노인 남자의 뒷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 본 경이가 경직된 얼굴로 멈춰 선다.

철호 (조심스럽게) 자기 아버지 맞지? 좀 전에 퇴근하고 들어오는데 버스 안에서 만났거든. 내 옆자리에 앉더니 결혼은 했냐? 아기는 있냐? 하는 일은 뭐냐? 묻는거야.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꾸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에 대해서도 묻더니 우리 집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묻더라고. 차에 서도 같이 내렸는데 집으로 오다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까 멀리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는거야. 그제서야 생각하니 자기 아버지인 것 같더라구.
경이 (노인의 등 쪽에 고정된 시선에서 눈물이 흐른다)
철호 장인어른 맞지?

그 때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와 이어서 떠나는 소리. 노인은 사라지고 조명이 정류소 표지판을 비춘다.

버스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며 어깨를 들썩이고 눈물을 흘리는 경이에게 철호 부모가 다가온다.

철호부 (자상하게 경이 어깨에 손을 얹고) 상처 없는 영혼은 없는 뱁이다. 허지만 상처뿐인 영혼도 없는 뱁이지. 파도가 넘어오듯 기쁨과 슬픔이 연달아 다가오는 것이 인생이고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겹쳐져 있는 거여. 니 아픈 세월은 니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이 니 인생의 전부는 아닌거여. 살다가 또 너에게 아픔이 온다고 혀도 그것 또한 니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지. 전부는 아닌거여. 그저 아픔은 아픔대로 행복은 행복대로 한 바구니에 따서 담는 것이 인생인거여.
철호모 (아쉬움) 오메, 사둔한티 인사도 못혀서 어쩐다냐. 니 얼굴 한번도 못 보고 그냥 가셔 버렸다.

경이가 울음이 터져 소리 내어 운다.

암전.
 
어두운 무대.
전화벨이 크게 울린다. 경이가 무대 가운데로 와서 전화를 받는다. 경이에게만 조명이 비춰진다.

경이 여보세요.
남자목소리 여보세요. 거기 한철호 씨 댁이죠?
경이 네 그런데요.
남자목소리 서울에서 김경이 씨 앞으로 배달이 왔는데요.
경이 배달요? 누가 뭘…
남자목소리 아 네, 피아노 배달입니다. 그리고 무슨 아기용품이라고 써 있는 박스도 하나 있네요. 그리고…보내시는 분은…(사이, 종이 넘기는 소리) 아, 그냥 [아빠]라고만 적혀 있는데요.

수화기를 든 채 울먹이다가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경이.
동그랗게 경이를 비추던 조명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점점 어두워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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