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봄햇살 머금고 가신 목사님이 그립습니다"

[ 교단 ] <한경직목사 별세 10주기 특집 1> 청빈과 겸손한 삶 실천, 목회자상 제시한 시대의 사표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0년 04월 01일(목) 16:53
   
▲ 고 한경직목사.

한 세기 가까운 삶을 살았던 추양(秋陽) 한경직목사는 길고도 굵은 흔적들을 남겼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의 삶을 통해 각자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성찰한다. 청빈과 겸손으로 대변되는 한경직목사,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0년이 지났다. 우리가 다시 한경직목사를 기념하는 것은 단지 시대의 사표(師表)였던 그가 그리워서만도 아니고, 그의 족적을 되짚어 이야기 거리를 만들고자 함은 더욱 아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추양이 남긴 유산들 속에는 여전히 우리들이 곱씹어 봐야 할 많은 것들과, 교훈으로 삼아야 할 편린(片鱗)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본보는 4월 한 달 동안 추양의 삶, 목회자로서의 신앙과 신학, 목회, 선교와 교육, 봉사 등을 통해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신앙의 책임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모든 것 다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 시인 고훈목사는 추양의 영전에 바친 시에서 그를 이렇게 추억했다.
 
추양의 가장 큰 이미지를 말하라면 바로 '가지지 않았던 삶'이 아닐까. 고훈목사의 시구에는 그가 지나온 삶의 검소함이 소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한경직목사의 청빈하고도 겸손한 삶 위에는 목회자로서 강직했던 발걸음이 더욱 깊게 드리워져 있다. 본보 1964년 11월 14일자부터 4주간 게재된 한경직목사의 '한국 교역자의 자세'에 보면 그가 얼마나 목회자로서 뚜렷한 윤리의식을 가졌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무엇을 하겠다말고 '무엇이 되겠다'는 자세를 갖자. 다방면으로 성장하고 영안의 '비전'을 보자"(11월 14일자) "강단은 연단이 아니라 성서반포로, 항상 목표가 있고 실제적인 내용, 교인생활의 세밀한 부분 파악하고, 확신과 성령에 넘치는 설교라야"(11월 21일자) "당회행정에 올바른 자세를 갖고 심방은 약한 집 먼저 찾길"(11월 28일) "교역자 자신은 뚜렷한 교회관을 갖고, 개교회는 상회와 긴밀한 연락이 필요하다"(12월 5일)
 
당시 4차례의 연재를 통해 추양은 목회자의 본분과 설교의 본질, 교회와 총회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천명하며, 급성장하던 한국교회 앞에 경종을 울렸다. 한 목사의 이 같은 일갈은 특별한 '사상'도 아니었고 원고청탁을 받아 급히 짜낸 '글'도 아니었다. 원고가 담고 있는 무게감이 남달라 보이는 것은 분명 원고지 속에 그의 삶이 솔직담백하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평소 목회자들에게도 "예수를 잘 믿으시라"고 당부했던 추양은 '성역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책에서도 "목사는 천국의 문지기로서 그 자신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건축가가 자기가 지으려는 집을 먼저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듯 교역자는 비전을 가지고 목회에 충실히 임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계속 자기 성장에 매진하여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합니다."라며, 목회자의 사명을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장로들을 향해서도 "공정하게 교회를 다스리고 덕으로 교인들을 대해야 합니다. '말'을 조심하며 '교회평화'를 위해 자기를 이겨야 한다. 성경에 명시된 장로의 자격을 생활화하여 모든 교인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집사와 청년들을 향해서도 "법과 규율과 경우를 초월해 사랑과 화합으로 다른 사람을 용납할 만한 마음의 그릇을 넓히고 모든 불의는 사랑으로 쫓아내라", "나라 사랑하는 참길을 주안에서 찾으라. 나라가 여러분을 부를 때에는 목숨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각각 당부하기도 했다.
 
한편 한경직목사는 분단이 곧 종식되고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대의 소망'을 주제로 한 한 대담에서 "80년대는 교회가 꼭 성장하는 기회로 삼아서 힘써야 해요. 그리고 제 예감이지만 80년대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평화적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겨져요"라며, 통일의 때가 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통일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만큼 추양은 그 전에 한반도의 복음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한국교회가 80년대 말까지 2천만 명을 전도하자는 목표도 이즈음 세운 것이었다.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도 한경직목사는 올곧은 소신을 품고 있었고 생전에 수시로 이를 밝힌 바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추양은 갈갈이 분열된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아래 하나로 연합하든지, 아니면 제3의 기구를 만들어 그 안에 모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1981년 4월 5일 열렸던 한국장로교협의회 창립예배에서는 교회연합의 원칙을 천명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를 위한 주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추양은 "교회의 일치와 통일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한국의 갈라진 장로교단들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고 이해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라는 에큐메니칼의 기본정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발전을 견인했던 한경직목사는 2000년 4월 19일, 9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추양이 참석했던 마지막 공식일정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자신의 98회 생일을 기념하는 감사예배가 그의 마지막 외출로 남아있다. 다시 열어본 본보 1999년 2월 6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져 있다. "휠체어에 의지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한 한 목사는 예배 끝까지 참석, 축하하기 위해 온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을 나누는데 조금의 인색함도 없었던 추양 한경직목사는 생의 종착점을 향해 바삐 달려가던 그 순간에도 얼마남지 않은 사랑의 기운을 어린 아이들에게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그의 숨결대신 그가 남긴 여러 유산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추양이 떠난 바로 그 4월, 그가 남긴 많은 신앙의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추양의 손길과 삶의 모습들이 그리운 것은 신앙의 후배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인 듯 하다.


*"아바지~" 영락교회를 세운 영성의 아버지, 당신의 간절한 기도는 계속됩니다.
  
신의주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한경직목사는 공산당을 피해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입성해 1945년 12월 2일 27명이 모인 가운데 영락교회를 세운다. 당시 교회명은 베다니교회로 초창기부터 피난민들과 만주를 비롯해 일본에 징용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유명세를 탔다.
 
추양의 목회방침은 늘 사람을 섬기는 데 있었다. 그런 철학 탓이었을까. 교회는 지속적으로 부흥을 했고 1949년에 들어서면서 교인이 6천명을 넘어섰고 현재의 석조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고 교인들이 다시 모이는 혼란한 세월을 지나면서도 영락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한국교회의 중심에 우뚝 선 영락교회의 발전사는 곧 한국교회의 발전사와 맞닿아 있고 이를 이끈 것이 바로 한경직목사였다.
 
개척하고 1년도 되지 않아 교회를 개척했고 이후 교회의 성장과 비례해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도 영락교회의 몫이었다. 이와 동시에 한경직목사는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조했다. 역사적으로도 영락교회가 전도를 많이 하는 교회로 인정받았던 것은 '전도하는 교회'를 지향했던 베다니 전도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도 많은 수의 영락교회 교인들은 짙은 평안도 사투리로 설교하던 추양과 '아바지...'라는 간절함 부름으로 시작하던 그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떠났고 우리는 기념한다. 그의 삶이 보여준 많은 것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지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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