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겸손의 사람"

[ 교계 ] 윌리엄 린튼선교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0년 03월 09일(화) 14:23
   
▲ 지난 1일 3.1절 91주년 기념식에서 차남 유진 린튼이 윌리엄 린튼을 대신해 이명박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다.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명:인돈 1891∼1960)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지난 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91주년 3ㆍ1절 기념식에는 11명의 린튼가(家)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은 고(故) 윌리엄 린튼을 대신해 차남 유진 린튼(1924∼)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전달받았다.

지난 2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진 린튼은 한국 정부에 대한 감사를 표한 뒤, "나의 아버지는 겸손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늘 자랑스러워 했고 신사참배에 대한 원칙을 세워 지킨 것에 대해서도 옳다고 생각했다. 후손들이 한국을 잊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당부의 말을 묻자 "우리의 희망은 한국이 잘 살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었는데 이미 그렇게 되지 않았냐"고 반문한 그는 "IT 등 한국은 이미 어떤 분야에서는 미국을 앞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는 것 또한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는 말을 재차 하셨을 것이고 세계를 복음화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칭찬하고 계속 그렇게 정진하라고 격려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후손들이 공개한 '애틀랜타인이 말하는 한국인의 자유 추구' 제목의 지역신문 기사(1919년)에서 윌리엄 린튼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소상히 전하며 "저항을 진압하는 (일제)정부의 유일한 수단은 참여자들을 체포하는 것 뿐이었으며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머지않아 감옥은 연령을 불문한 한국인으로 넘쳐났다. 그것은 '비폭력 저항(revolt without violence)'이었다"고 증언했다.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26일 한국을 찾은 일행은 신흥학교, 한남대, 지리산 노고단 선교유적, 양화진묘원 등을 방문하며 분주한 일정을 소화한 뒤, 지난 3일 출국했다.

   
▲ 후손 및 한남대 관계자들이 윌리엄 린튼의 동상 앞에 함께 자리했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남장로교선교사로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뒤 한국에 들어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48년간 호남 충청지역의 선교 및 교육사업을 위해 헌신했다. 군산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고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암투병 중에도 대전대(지금의 한남대) 설립에 매진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지 두달만인 1960년 8월 사망했다. 1919년 전북 군산 만세지위 운동을 지도한 그는 3ㆍ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추방, 광복 후 다시 들어와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한편 그의 한국사랑은 장인 유진벨(한국명:배유지 1868∼1925)선교사를 포함, 셋째 휴 린튼(한국명:인휴 1926∼1984)선교사, 넷째 드와이트 린튼(한국명:인도아 1927∼2010)선교사와 인세반대표(유진벨재단) 인요한소장(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 등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으며 한남대는 초대 학장인 윌리엄 린튼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인돈학술원을 설립, 매년 각 분야의 인사들에게 인돈문화상을 시상하고 국제학부인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설립하는 등 국제화 인력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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