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같은 색깔, 향기를 가지는 것

[ 땅끝에서온편지 ] <1> 유럽의 중원, 폴스카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2월 25일(목) 10:01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가장 큰 국경일인 성탄절 즈음에 40여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더니 이제 그 수가 1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영하 30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지만 올해는 영하 25도에 수은주가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폴란드 선교사라며 소개를 하면 어떻게 그곳을 가게 되었느냐는 질문과 동시에 지금까지도 폴란드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폴란드는 1998년 동유럽국가 중에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버리고 민주화의 불을 지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웬사가 이끌었던 자유노조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폴란드 교회의 힘이 가장 컸다.

1998년 3월 7일 진주남노회의 세계선교부 파송으로 몇가지 옷과 등산용 식기를 넣은 배낭을 들고 네식구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폴란드 크라쿠프 땅을 밟았다. 1년동안 코펠에 밥을 해먹으며 옷 한 벌로 4계절을 버티는 가운데서도 날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기대 속에 신이 나있었다.

IMF의 영향으로 힘든 것도, 고국에 대한 향수의 외로움도 느끼지 못하며 그야말로 전투적으로 초기의 정착을 이루어 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리나 공항, 은행 등 관공서에 기관총을 맨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과 무표정한 폴란드인들의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생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3천8백만 명의 인구에 국토는 한반도의 1.5배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90퍼센트 이상이 평야로 되어있어 활용 면적은 몇 배 더 많다고 봐야 한다.

   
▲ 폴란드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 선교는 현지인들과 같은 색깔이 되고 같은 냄새를 풍겨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인접해 있는 국경은 서쪽으로는 독일과 체코, 남쪽은 슬로바키아, 동쪽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백러시아), 리투아니아, 북쪽은 러시아와 발틱 해를 건너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인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를 만날 수 있다. 현재 EU 가입국가로 경제와 정치 그리고 지리적 요건으로 중앙유럽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선교초기에는 국민소득이 5천달러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1만 7천달러를 넘는다. 또한 서유럽과 동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비롯한 발틱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을 연결하는 선교의 허브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유럽의 중원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겪은 작은 문화충격을 소개하고자 한다.
24시간 문을 열고 있는 한국의 가게와 달리 이곳은 오후 5~6시가 되면 상점이 모두 문을 닫는다. 목요일 저녁부터 부활절 연휴가 시작되는 것을 모르고 있던 우리는 빵과 물을 얻지 못해 월요일이 될 때까지 무척 고생했다.

월요일 아침 일찍 가게에 가던 길에 양동이와 물병을 손에 든 폴란드 청소년들과 마주쳤는데 우리를 옆으로 훔쳐보던 아이들이 서로 보며 웃더니 갑작스럽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온몸이 물에 젖었지만 목사로서 화를 낼 수 없는 터라 웃고 넘기려니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으면 후일에 우리 아이들이 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혼을 내주기로 하고 고함을 치며 잡으러 갔는데 한 시간여를 따라 다녔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고 어설프게 아이들을 혼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화만 불렀으니 그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어렵게 방을 구했는데 다시 이사해야 하는지 너무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찾아온 유학생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웃으며 하는 말이 부활절 다음 월요일은 성수세일로 물을 뿌려 죄를 사하는 풍속이 있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그것도 예쁜 여자에게만 물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좋다고 물을 뿌렸는데 처음 듣는 이상한 말을 외치며 잡으러 오는 동양인(그 당시만 해도 크라쿠프에는 동양인을 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그 아이들은 아마도 그 날 마음 고생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선교지에서의 정착은 많은 충격들을 흡수하며 그들과 같은 색깔이 되고 그들과 같은 냄새를 풍겨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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