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어주는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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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10일(수) 16:37

교회협 에큐메니칼 선교훈련을 다녀와서

지난 1일부터 6일간 25명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에큐메니칼 선교훈련원에서 실시하는 제2기 신학생 에큐메니칼 해외선교 훈련차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우리가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선교현장을 돌아보면서 느낀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강도떼를 만나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히 농촌의 피폐함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베트남인들은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의 오랜 지배와 착취를 받은 데다가 자국을 침공한 미국을 강도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베트남 교회가 만든 전도지가 '왜 기독교는 미국 종교가 아닌가?'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기독교에 대한 피해의식과 적대의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들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솔직히 한국은 월남전을 70년대 경제발전의 계기로 삼았고, 월남전에서 사용했던 건설기계로 중동 건설 수주의 붐을 일으켰으며, 북한에 비해 절대적으로 군사적 열세에 있던 우리 국방 능력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점에서 어쩌면 월남전이 한국 발전에 거름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 전체가 킬링 필드라고 불리는 캄보디아, 어디를 돌아보아도 온통 쌓인 해골과 죽음의 흔적들, 절대빈곤에 허덕이며 관광객 주위에서 '원 달러'를 외쳐대는 어린이들, 온통 떼죽음을 당해 가르칠 교사도, 의사도, 기술자도 없는 그 땅, 그렇게 많은 쌀을 생산하면서도 도정기술이 없어 베트남에 벼를 팔아 쌀을 사올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우리는 감히 '희망'이라는 말을 던져주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대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대로, 미얀마는 미얀마대로, 라오스는 라오스대로,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곳이 바로 인도차이나 반도인 셈이다. 주님은 이렇게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언급하셨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그는 강도 만나 거의 죽음에 이른 그를 도와야 할 아무런 책임이 없는 자였다. 동족도 아니었고 그들이 동물 취급하던 사람이었으며, 또한 여행 중인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의 돈을 지불하면서 밤을 새워 간호한 반면 반드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야 할 종교인들은 그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이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 성도들의 사랑의 헌신으로 선교사들에 의하여 거지처럼 버려진 그들에게 희망의 집이 제공되는가하면, 영양죽으로 어린이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학교가 세워지며, 지하수 개발로 맑은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공부방에 어린이들이 몰려들고, 심지어 마을 공동작업장에서 내일을 꿈꾸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희망의 모습을 보았다.
 
한 선교사님은 선교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선교란 그들에 대한 존중이요 이해요 섬김이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것이야 말로 선교의 기본이요 핵심인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페러다임은 확실히 달라져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세계를 품지는 못할지라도 우리가 속한 아시아는 반드시 한국교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명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곳에 교회를 몇 개를 세웠느냐는 과시 위주의 선교, 업적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그야말로 조용히 다가가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강도를 만나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그들에게 살포시 손을 내밀어 잡아 일으켜 주는 사랑의 선교야 말로 진정으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일이 아닌가 조용히 제안해 본다.

최 무 열
부산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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