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신문 조각이 맺어준 비행기와의 만남

[ 나의삶나의신앙 ] 이신수장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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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10일(수) 13:24
부산북교회ㆍ(주)SKAI 대표이사

매일 토요일 저녁이면 할머니는 정지에서 단지에 물을 떠서 몸을 씻기시고 옷을 갈아입히시며 주일을 준비시키셨다. 헌금은 항상 다리미로 다려두신 돈으로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앞에서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기도가 끝나기전에 눈이라도 살짝 뜨면 그날은 아주 혼쭐이 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신앙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배우면서 성장했다.

   
▲ (주)SKAI에서 인수하는 이태리 SIVEL사의 경비행기. SD-27 초기모델을 시작으로 첨단 경항공기 4개 모델을 제조 판매하게 될 예정이다. 한장의 신문광고는 철공소 견습생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극적으로 들어간 공군기술고등학교의 졸업사진.
한번은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현충사를 방문했던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충무공 참배를 끝내 거부하면서 야구방망이로 맞고 병원으로 실려가 2주간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잘못을 시인하라고 했을때 나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 뿐입니다"라고 했다. 처음 몇대를 맞을 때는 통증을 느꼈지만 그렇게 답한 후엔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기쁨이 샘솟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어렸을때 꿈은 법관이었다. 가장 정직한 사람이 법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할머니의 기도대로 나는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아버지가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법관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부친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나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친구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할일이 없었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철공소에 들어갔다. 자동차 부품공장에 찾아가 견습생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런 나와 비행기와의 인연을 맺어준 것은 한 장의 신문광고였다. 어느날 화장실에서 화장지가 없어 신문지를 비비는데 우연히 공군기술고등학교(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의 전신)에서 후보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학비가 무료였고 숙식도 제공해준다고 했다. 석면가루를 뒤집어쓰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일해봤자 철공소 사장밖에 더 되겠나,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그 생활을 탈피하고 싶었다. 무조건 해야했다. 내가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경북사대부고 대강당에서 시험을 보던 날, 추운 날씨에 잔뜩 긴장된 채로 4시간을 쪼그려 앉아 문제를 풀다보니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문제였다. 시험장을 나가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에 나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결국 시험을 보고 나오는 길에 운동장에 그대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다. 합격발표가 나던 날도 어김없이 나는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합격여부를 제일 먼저 확인하고자 병무청 앞으로 달려가셨던 모양이다.

'대구경북4.' 그때의 수험번호다. "신수야, 너 됐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껴안으시고는 감사기도를 하셨다. 나는 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문제는 중학교 졸업장이었다. 3학년 2학기에 하루도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나는 졸업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담임이셨던 남규진선생님의 사랑과 배려로 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고 학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앞으로 인재를 양성하며 그 빚을 갚고자 한다.

극적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3년간 국비로 공부하고 8년 6개월 동안 의무복무했다. 군복무기간 동안 대학을 졸업했고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상복도 누렸다. 26살에 상사로 진급, 1981년 전역하기까지 미국 대만 등으로 해외 출장도 가고 국가의 혜택을 많이 누렸다. 전역과 동시에 삼성전자를 거쳐 대한항공에 취업을 하게 됐고 18여 년을 근무했다. 기도의 보따리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나를 철공소 견습생의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우연히 발견한 신문조각은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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