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 나의삶나의신앙 ] 류광열장로 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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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14일(목) 10:50
   
▲ 필자는 새농민회 사무총장과 회장으로 전국의 농민지도자들을 이끌기도 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현재 노회와 장로회 사역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내의 발병과 치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험을 하면서 필자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매주일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출석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변화는 아내의 소중함을 더욱 크게 느낀 점이다.

 지금도 서울서북노회 장로회와 노회 활동을 하면서 모든 시상 및 여행은 부부동반으로 진행한다. 남편이 아무리 큰 일을 했다하더라도 뒤에서 조력한 아내가 없었다면 그 일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했고,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진행하는 것은 수고한 아내가 남편과 함께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필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신념 때문이다.

교회를 섬기면서 1992년에는 30평 남짓한 작고 초라한 슬레이트 교회를 헐고 건평 1백80평의 아름다운 새 성전을 신축했던 경험은 필자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아내의 치유와 함께 삶의 방향을 바꿀만한 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축산업을 하면서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축산업을 위한 토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다니며 견학한 경험을 통해 그 곳의 기후와 토양에 비해 우리나라의 조건은 축산업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축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풀이 잘 자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든 상태에서 5~6일만 지나도 풀이 시들시들해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양만(養鰻ㆍ뱀장어 양식)사업에 과감하게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됐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외국을 돌며 시장조사와 설비 시설 등을 견학한 후 한국에 돌아와 양만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농업과 축산업은 완전히 접고 새로운 사업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우리가 키워낸 장어는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일본에 수출을 시작하면서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아내가 회복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그야말로 외우내환이 없는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1985년에는 당시 전두환대통령에게 사회발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국가 발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김대중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외에도 장한 한국인 대상, 무궁화대상 등 그야말로 상복이 터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작은 농업인의 성공과 사회발전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 속에 하나님과의 약속은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감사 서원은 개인의 성공 속에 묻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무래도 하나님 백성과의 친밀한 교제인가 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세상 일에 매달리느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은 나에게 다시 대화를 시도하셨다.
1996년 여름 하늘이 뚫린 것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일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 속에서 전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어 양식장이 잠겨버렸다. 여름의 엄청난 폭우는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이어져 급기야 집이 잠기고 양식장은 모두 파손되어 키우던 장어들은 모두 논바닥으로 흘러 들어갔다.

천재지변과 같은 폭우 앞에서 인간의 힘은 미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많던 재산은 순식간에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폭우 피해를 입은 3년 동안 우리 가족은 옷과 라면, 쌀까지 모두 남에게 얻어 먹어야 했다. 왠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성격인 필자도 그 3년 동안은 양어장 뒤에 가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당시 하나님은 필자를 한마디로 '납작'하게 만드셨다.
 
류광열/ 삼성교회 장로ㆍ갈릴리농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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