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족'…차별ㆍ편견 버려야

[ 지금은 다문화사회 ] 다문화 사회의 이주민 선교를 위한 성서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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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07일(목) 10:34

 

   
▲ 박 흥 순
숭실대학교 교수
이주민의 거주와 공존의 문제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까닭은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서는 '탈영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전통과 관습을 가진 이주민이 우리사회에 거주함으로써 다문화 사회에 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순혈주의 이데올로기의 극복이나 사회통합과 같은 단순한 측면의 접근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이주민의 현실은 경제적 측면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인간답게 살 권리인 '생존', 노동자로서 신분보장인 '노동', 자유로운 거주와 체류의 권리인 '인권'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이주민의 문제를 단순하게 경제적 관점만으로 진단할 수 없으며, 정부와 지자체 주도의 일방적 사회통합 시도에 의존할 수도 없다. 이주민 선교는 경제적 측면을 능가하는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보다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 성서에 나타난 이주민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주민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의 조상들이 본래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고(창 11:28; 신 26:5; 겔 16:3), 야곱의 자손들이 사백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생활했던 것에 관해서 기록한다(창 15:13; 출 12:40~41).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주민에 대한 이해는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과도하게 배타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이집트에서 이주민으로 살았던 경험에 바탕을 둔 관용과 공존의 시각을 갖는 두 가지의 흐름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구약성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이주민에게 배타주의의 편견과 차별을 넘어 호혜와 공존의 보편주의의 정신에서 더불어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앙공동체의 기독교인은 이주민의 삶을 살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 다른 피부색, 다양한 언어, 신분적 차이 그리고 다른 전통과 관습을 지니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공존했다는 놀라운 일이다. 인종적으로, 신분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차별이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통합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갈 3:28; 골 3:11).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구성원은 피부색, 인종, 계급,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엡2:19). 새로운 결속을 위해서 형성된 '하나님의 가족'은 차별, 편견 그리고 불평등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려 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 이주민을 위한 대안적 성서해석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다문화 사회의 이주민을 위한 성서 해석을 제안하면 첫째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주민의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막 5:1~20). 신자유주의 시대의 억압으로 인해서 고난 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5장 1~20절의 본문은 무덤에서 살지만 쇠고랑과 쇠사슬에 속박된 귀신들린 사람이 등장한다. '귀신', 즉 '악한 숨결'에 묶여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악한 숨결'로 인해서 신음하는 이주민이 우리사회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독교적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가복음의 본문은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막강한 힘의 귀신, 즉 '악한 숨결'에 억압을 받고, 속박되어 있던 사람이 치유되고 회복되었을 때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귀신'의 지배와 착취로부터 벗어나 회복과 해방을 경험했던 한 사람의 '생명'보다 이천 마리의 '돼지 떼'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이다(막 5:14, 17). '경제가치'에 맞서서 '생명가치'를 외칠 수 있는 용기는 성서적 가르침을 통해서 제시되어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이 쇠고랑과 쇠사슬에 메여 무덤에서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즉시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군대'라는 이름을 갖고 막강한 힘을 휘둘렀던 귀신이 억압, 착취, 속박 그리고 죽음으로 사람을 내몰고 있지만, 생명과 정의를 지향하는 예수님은 거대한 귀신의 세력에 맞서서 회복과 해방을 외친다.

둘째로 정의의 관점에서 이주민 선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마 20:1~16). 이주민 선교는 경제적 관심이나 호혜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포도원 일꾼 비유'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온종일 일했던 노동자가 단지 1시간만 일한 노동자와 똑같은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한경쟁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산과 정당한 대가를 주장하는 현대사회의 계산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표현한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정의'는 희망도 없고, 힘도 없고,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주민 선교는 '하나님의 편향성'과 '우선적 선택'의 관점에서 진행해야 한다. 포도원 일꾼 비유는 신분과 위치의 역전을 강조하면서 끝맺고 있다. 포도원에 가장 늦게 들어 온 노동자가 가장 먼저 온 노동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적 이윤과 효율을 앞세운 경제 가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가치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우선적 선택과 관심'에 있다. '포도원 일꾼 비유'의 주된 관심사는 포도원에 가장 늦게 들어 온 노동자들을 환영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호의'에 있다. 이주민 선교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과 관심'이 한국 교회의 모든 기독교인을 위한 삶과 신앙의 실천적 근거가 될 때 가능하다.

# '하나님의 정의'의 눈으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형태의 이주민의 현존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의 기독교인에게 도전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던 신앙공동체의 기독교인들도 모두 이주민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난민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이주민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을 요청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주민을 바라볼 때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속박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생명과 자유를 선언했던 예수님의 해방적 실천이 절실히 요청된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 선교는 경제적 도움을 제공하는 시혜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생명과 인권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정의'를 주목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해서 바라 본 이주민 선교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구성원 가운데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으로 살아가는 이주민을 향한 우선적 선택과 관심이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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