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오늘도 비명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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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07일(목) 10:30
   
▲ 김 현 철
낙태반대운동연합
회장 대행
1940년대만 해도 태생학, 발생학, 태아학이 없었다. 그러기에 "태아도 인간인가?"라는 문제는 신앙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발전은 과학적으로도 태아가 유일하고 독특한 별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와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난자의 만남으로 46개의 인간 염색체를 가진 뚜렷한 인간으로서의 수정아(受精兒)가 창조된다. 이것은 토끼도 아니고, 홍당무도 아니다. 오직 인간일 뿐이다.

수정아는 인간의 모든 형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향후 죽을 때까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더할 것이나 뺄 것이 없다. 이 수정아는 5~10일 후 나팔관을 타고 자궁으로 내려가 자궁벽에 착상하는데, 모체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을 뿐이지 그의 성장이나 세포의 재생산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정아는 모체의 자궁과 연결시키는 태반의 시초를 자기 세포로부터 발생시키고, 착상 후 3일 내에 모체에 호르몬을 통해 "내가 당신과 연결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어 월경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열 달 후의 분만을 위해 골반을 연하게 하도록 명령한다. 18일이 되면 어머니와는 다른 혈액형(또는 같은 혈액형)의 피를 심장이 펌프하며 피를 순환시키고, 40일이 되면 이미 뇌파가 측정되며, 6주가 되면 고통도 느끼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6주반이 되면 젖니의 뿌리가 형성되며, 초음파 녹음을 통해 심장고동 소리도 들을 수 있다. 8주가 되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신체구조가 형성되고, 뚜렷한 지문도 발견된다. 이때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민감히 반응하고, 태아의 위는 위액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11주에서 12주가 되면 태아 특유의 호흡을 시작하며 이 운동을 통해 호흡기관을 키워가며, 11주에는 삼키기도 하고, 손톱도 생긴다. 12주가 되면 모든 기관이 존재하고 정상작동을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자궁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 크기만을 키워갈 뿐이다. 누구나 이러한 성장의 단계를 거친다.

"태아도 인간인가?"란 질문은 사실 낙태라는 의료기술이 개발되고 시행되기 때문에 생긴 질문이지 본래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남편이 아내로부터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 "저 수정아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일까, 또 법적으로 인간권리가 있는 개별 인격체인가, 또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전혀 없이 "오, 내 아기!"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반응에 정답이 담겨 있다.

문제는 나의 편의를 위해 낙태하는 세태 속에서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도덕적으로도 눈감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피임방법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낙태가 있어야 한다고. 그 반대이다. 낙태라는 비상구가 있기 때문에 피임을 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낙태가 피임의 방법인가, 아니면 살인인가?

낙태는 그 한 사건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편의를 위해서라면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좋다는 낙태형 사고방식(Abortion mentality)이 문제이다. 낙태형 사고방식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끼리 서로 상처와 피해를 주며 살아가는 형국을 만들어 내고 말 것이다.

왜 교회가 그렇게도 낙태에 관해 침묵일까? 침묵이 사랑의 방식인가?
낙태를 경험한 사람이 교회 내에도 많다. 그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침묵한다면 그것은 계산착오이다. 침묵할수록 그들은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된다. 또 계속 침묵한다면 낙태를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날 것이며, 하나님의 훌륭한 피조물인 아기들은 죽어갈 것이다.

세계 각지의 기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우리들이 어째서 낙태에 대해서는 마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단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면 이제는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이제는 더 이상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리 없이 죽어가는 불쌍한 아기들을 위해서 누군가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필자는 엄숙히 신앙고백을 한다. "낙태에 대한 교회의 침묵은 살인방조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수천, 수만의 아기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엄마의 손을 잡고자 애쓰는 아기의 손이 뿌리쳐지지 않기를 위해서 우리는 구명의 현장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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