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는 삶을 살자

[ 논설위원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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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05일(화) 19:07
임화식/목사ㆍ순천중앙교회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근교에 몽골의 명장 톤유크의 비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즉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칭기스칸의 경고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이런 삶의 지혜는 일찍이 유목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칭기스칸은 12~13 세기에 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원,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자, 문맹의 야만인이었다. 기약 없는 이동과 끊임없는 전쟁, 잔인한 약탈이 그가 학습할 수 있는 세상사의 전부였다. 거친 자연 환경의 변화 속에서 칭기스칸은 판단했다. "가난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몽골인들을 해방시키는 길은 몽골 고원 바깥에 있다. 고원 안에서 아귀다툼을 할 게 아니라 고원 밖으로 나가자. 그래야만 모두가 배불리 먹으며 살 수 있고 더 이상 동족상잔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몽골 유목민은 칭기스칸의 결정을 따랐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백 킬로미터씩 대지를 내달리며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농경 정착민들을 보면서 머물러 사는 자의 안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했다.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 시킨다는 사실도 체험했다. 결국 유목민들의 문명과 농경문명인들 간의 충돌에서 유목문명이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렇다면 유목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유목민은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한시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떠돌아다니는 삶에 맞춰 소지품을 간소화하고 정보를 능란하게 수집하고 속도를 중시한다. 최고의 가치는 오아시스 위치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접속하고 소통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수평적 사회를 확대해 나갔다. 이런 유목민과는 아주 대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소위 농경문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을 쌓고 울타리를 늘리며 공간 이동을 회피했다. 농경문화 속에서는 이웃 사람, 이웃 마을, 이웃 나라와 교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보다 높은 성을 쌓고 울타리를 늘리는 일에 주력한다. 이곳에서는 소유의식이 강하고 사회 구조가 수직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자리가 중요하고 사람마다 혈연으로 뭉치고, 지연으로 묶고, 학연으로 얽어맨다. 그 결과 유목문명은 주로 열린 구조의 수평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고, 반면에 농경문화는 닫힌 사회와 수직적 사고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항상 옆을 봐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보다 넓은 푸른 초지를 찾아 헤매야 한다. 초원에는 미리 정해진 주인도 없다. 고향이라고 내세울 곳도 없다. 이기면 주인이 되고 지면 노예가 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 그 속에서는 단 하루도 현실에 안주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 초원에서는 동지가 많아야 살아남고 적이 많으면 죽게 된다. 완전개방이 최선의 가치로 개인의 개방화는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자리는 군림과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사회만이 영원하리라는 역사적 교훈을 'CEO 칭기스칸'이라는 책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핸드폰과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21세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절실하고도 매서운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IT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 인프라 구축에 성공한 우리나라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21세기에는 성을 쌓는 사람보다는 길을 내는 사람들이 더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은 자명하다. 농경 문명의 닫힌 사고보다는 유목문명의 열린 사고를 할 수 있어야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될 것임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의 삶 도처에서 양극화의 심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4대강 사업의 추진과 세종시 건설에 따른 갈등,,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용산참사의 처리문제 사사건건 물고 물리는 여야의 모습,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서로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국론은 완전히 양분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성을 쌓는 무리 쪽에 서 있는가? 아니면 길을 내는 쪽에 서 있는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일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이유야 어떠하든지 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낮은 곳으로 임하기 원하셨던 주님처럼 삶을 살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말 것이라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새해에는 작은 땅 덩어리에서 옥신각신 하기보다는 좀 더 넓은 저 유라시아 대륙 실크로드를 따라 탄탄대로를 개척해 나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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