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기아 다소

[ 연재 ] 사도바울행전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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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05일(화) 18:53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유대 땅 북쪽,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소아시아의 길리기아(현재의 터키 공화국 동남 지역) 다소에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교도의 집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사울이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행 21:39).

바울의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대략 주 예수보다 4~6년 가량 연하로 보고 있다. 빌레몬서(주후 54년쯤)에서 "나이가 많은 나 바울"(몬 1:9)이라고 말하지만, 당시는 50세 이상인 사람을 노인이라고 불렀다.

   
▲ 바울의 고향 다소의 고갯길.
주후 30년대 초의 사건으로 추정되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던 그를 두고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9:58)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24세부터 40세까지의 사람을 가리켜 '청년'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바울의 나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길리기아 지방은 소아시아 남부를 동서로 뻗어 있는 해발 3천5백m 이상의 높은 타우로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펼쳐진 평야로서, 시리아 서쪽에 맞닿은 지방이다.

다소는 원래 헬라인의 시민 도시였다. 구약에 나오는 달시스는 다소, 야완은 이오니아(고대 헬라인)를 가리킨다. 바울 당시 다소는 헬라 문화를 이어받아 문화의 한 중심지였고, 운하에 이어진 항구 도시로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로마 시대의 헬라계 지리학자이며 역사가인 스트라본(주전 64년쯤 ~ 주후 21년쯤)은 그의 '지리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소의 시민들이 철학과 교양 일반에 걸쳐 지니고 있는 열의는 보통이 아니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시민의 수준을 훨씬 넘을 정도이다."

스트라본은 이어 길리기아 다소가 스토아 철학자 여러 명을 배출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히 황제 아구스도의 스승인 아테노도로스(전 1세기 무렵)가 훗날 다소에 돌아와 황제의 두둔함 밑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실을 말하였다.

바울은 라틴식 이름이다. 출생 때의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다. 사울은 회심한 후 이름을 바울로 고쳤다. 당시 유대인은 유대식 이름 외에 라틴식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행 12:12)하는 구절에서 마가(마르코스)는 라틴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으로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고 하는 뜻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울은 처음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름을 따다가 사울이라고 하였으나, 회심한 이후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이라고 불렀다.
바울 자신은 자기 이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행 15:9).

중세의 추기경 야콥 데 보라기네는 그의 '황금전설'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여섯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복음을 전한 '나팔의 입'이며, 사랑을 말한 '사람들의 입'이며, 회심을 한 '기적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며, 자비량 전도를 한 '선택의 기적'이며, 명상을 한 '평안'이며, 겸손한 '작은 자'이다.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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