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을 산같이 덕을 바다같이"

[ 아름다운세상 ] 1백세 청년 '방지일목사'가 전하는 새해 덕담 '격산덕해'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9년 12월 29일(화) 15:54
   
총회 파송 최초의 중국선교사, 평양 장대현교회 시무 전도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본보 사장과 이사장 역임, 증경총회장 등 한국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방지일 목사. 1911년 생, 우리 나이로 올해 1백세가 되는 방지일목사가 머물고 있는 등촌동 노인요양시설을 방문한 날은 겨울날씨 답지 않게 포근했다. 2010년 새해를 맞으며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마디 부탁할 요량으로 말문을 열자 방목사는 거실 벽에 붙어있는 '格山德海(격산덕해)' 족자를 가리키며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했다.

"기자 선생, 88세를 뜻하는 미수 한자를 어케 쓰는지 아시요? 일본사람들이 쌀 미(米)를 써서 미수(米壽)라 하는데 중국서는 눈썹이 희어진다 해서 눈썹 미(眉)를 써서 미수(眉壽)라 하디. 내레(내가) 미수 때 받은 휘호 중에 이런 거 있었디. '壽比南山 福之如海(壽山福海)(수비남산 복지여해(수산복해))', 거 '남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복을 누리라'는 뜻인데 오래 사는 거이 뭐 됴카써(좋겠어)? 기래서 내 바꿨디 '格比南山 德之如海(格山德海)(격비남산 덕지여해(격산덕해))'라고. '인격을 산같이, 덕을 바다같이 쌓으라' 이 말이디. 저건 내가 만든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거이야. 오래 사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거이 중요하디."

1백26년의 한국교회 역사를 볼 때 방 목사는 그야말로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이라 하겠다. 3년 전 목사안수 70주년을 맞아 본보가 편집국장 대담을 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강령(康寧)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음성은 더 카랑카랑 힘이 넘쳤다. 1백년을 살아온 목회자 앞에서 고작 지천명의 기자가 갓난아이 같은 심정으로 물었다. "목사님, 목회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와 소떼를 맡았으니 '그들에게 내 마음을 다한다' 하는 심정으로 지내는 것이야, 목회는 '주님께서 목자시라 나는 그저 순종'일 뿐이디."

방목사는 욥기 1장 5절을 인용하며 욥이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의 '명 수대로' 번제를 드렸는데, 목회란 명 수대로 하나하나 제단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인터넷 서핑은 물론 이메일을 통해 국내외 지인들과 교류하는 등 컴퓨터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방지일목사. 국내외 강연 및 설교 등 바쁜 와중에도 1백4권의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하는 노트북 때문이다.
"우리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 여전도회원들, 찬양대원들 이렇게 '도매금'으로 하면 안돼. 목회는 양 하나하나 돌보고 제단을 쌓는 거이야. 교인들 위해 하나하나 기도하면 교인들이 다 목회자의 장 중에 있어 그 사람이 기분 좋은지 나쁜지 슬픈지 기쁜지 다 알게되지. 그거이 목회야."

방 목사는 마부가 마차를 끌 때 말고삐를 쥐면 말의 상태를 안다고 했다. 상태가 좋은 말과 아픈 말이 있으면 그 형편대로 말고삐를 조절해 마차를 끌고 가기에, 마차가 뒤집어지지 않고 잘 달릴 수 있다며 목회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편 요즘 교회들이 사회 봉사, 나눔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교회의 본질인 속죄구령을 전하는데는 소홀한 듯하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봉사, 그거이 믿지 않는 사람도 하는거잖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하는거디. 구걸하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금과 은은 줄 수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지 않았어? 근데 요즘 목회는 '은과 금은 있으나 예수는 없어서 못준다' 이거 아닌가 싶어… '예수는 내 구주시다', 속죄구령을 전해야디! 다른거는 자선사업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거이야."

방목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수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 "철저히 주님을 모시고 종으로서 순종하며 주어진 양떼를 목숨 다해 하나하나 돌보는 것, 그리고 교회의 본질인 속죄구령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2007년4월, 방지일목사 안수 70주년 감사예배에서 영등포교회의 현ㆍ전직 세 목회자가 나란히 자리했다. 좌로부터 김승욱원로목사, 방지일원로목사, 임정석담임목사.
원로목사나 증경총회장이란 직함보다 여전히 선교사라는 직함이 어울리는 것은 1백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내외를 왕성하게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젊은 사람도 소화하기 어려운 스케줄을 어떻게 관리하실까? 궁금했다.

 "목사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기거이 특별한 게 없어. 막 살디."

우문현답이랄까? 규칙적인 생활, 소식 위주의 규칙적인 생활, 이런 류의 모범답안을 기대했으나 전혀 뜻밖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산다는 것. 

"지방 강연모임 다녀오면 어떤 때는 자정을 넘겨 서울에 도착하디. 기럼 컴퓨터 켜서 이 메일 체크하고 목욕하고 한시간 쯤 성경 외이고 기도하고 조금 누웠다가 아침에 일어나디."

방목사는 이제껏 1백4권의 저서를 냈다. 다작이다. 그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늘 가는 곳마다 원고지 보따리를 들고 다녔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그의 손에 원고 보따리는 사라졌다. 노트북으로 대체된 것. 50대에도 소위 '컴맹'이 있는데 1백세의 노목회자가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자는 시간은 불규칙해도 일어나는 시간은 비교적 규칙적이라 했다. 아침엔 안마기계에 앉아 안마를 하고, 조간신문 보고 식사하고…그런데 식사 메뉴가 입에 안 맞으면 물 한잔 마실 때도 있다고 했다. 당신은 '막 산다'고 표현했으나 듣고 보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 따라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그의 건강비결인 듯했다.

50년 넘게 매주 월요일이면 자택에서 적게는 20명, 많게는 50명의 목사 장로들이 모여 여전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요즘은 로마서를 공부하는 중이라 했다.

   
▲ 갓 쓰고 도포 입은 선교사 파송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찍은 모습.
방 목사는 안수 받기 전인 1933~3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길선주 목사와 동역했다. 그 시절 이야기가 궁금했다. "길 목사님의 말세론 사경회는 많이 참석하였거니와 그분이 앞을 잘 못 보시니 손을 잡고 다니며 모셨디. 내가 장대제(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그 분은 이미 은퇴하셨어. 그러나 그 철저한 가르침이 아직도 기억나."

장대제교회 이야기를 하는 방 목사의 눈가에는 그리움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수 년 전 기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장대재엔 교회의 흔적은 간데없고 만수대로 지명이 바뀐 채 소년궁전이 들어서 있었다.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기 어려워 기자는 그저 새해 인사로 궁색하게 "목사님, 오래 사셔서 통일도 보시고 목사님 시무하시던 장대제교회도 꼭 가보셔야죠, 건강하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드렸다. '더 놀다가라'는 목사님 말씀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길에 "오래 사는게 뭐 중요해.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게 중요하디" 하셨던 말씀이 내내 귀에 아른거렸다.   hcahn@pck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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