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선교와 에큐메니즘

[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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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5일(화) 17:36

변창배/멜본서부교회 담임목사ㆍ
멜본神大 박사과정 재학

 1백20년 전 호주 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할 당시의 서구 교회는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선교역사가 라투렛의 말대로 19세기는 가히 '선교의 세기'였다. '금세기가 다 가기 전에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슬로건도 제시되었다. 영국의 의회가 식민지 확장 경쟁에 나설 때 영국의 교회들은 해외선교의 불을 붙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와 같은 영미계통의 교회들도 힘을 모아서 해외선교에 나섰다. 이들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서 국적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에큐메니칼적인 협력을 했다.

호주의 첫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목사가 파송된 과정도 그와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멜본에 거주하던 데이비스는 성공회 소속의 교인이었다. 그가 영국성공회 존 월푸 부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에 자원했다. 월프 부주교는 중국에 주재한 선교단체인 씨엠에스(CMS)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가 1885년과 1887년에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알리며 부산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데이비스 목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 ▲ 1925년 6월에 열린 선교협의회의 참석자들 모습.
1889년 10월에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해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장로회선교공의회가 조직되었다. 1884년부터 한국에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과 협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는 헤론 선교사가 회장을 맡고,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선교부의 데이비스 목사가 서기를 맡았다. 당시 한국에는 약 20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있었다. 대부분 미국의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었다.

이들 초대 선교사들은 에큐메니즘에 기초해서 협력했다. 신앙배경도 대개 초교파적이었다.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는 본래 영국인으로서 미국 화란개혁교회의 교인이었다. 북장로교의 알렌 선교사는 교육은 감리교 학교에서 받았고, 헤론 선교사는 영국 출신으로서 조합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미국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는 스위스 배경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나 독일 개혁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데이비스 선교사도 성공회 출신이었으나, 한국 선교를 위해서 빅토리아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 1897년에는 캐나다장로교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네 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지를 나누어서 협력했다. 1902년에 평양신학교를 설립할 때도 네 선교부가 협력했다. 네 선교부는 자기 선교지역 출신의 신학생을 위해서 기숙사를 각각 맡아 운영했다.

호주 교회의 한국 선교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문을 열었으나, 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이는 겔슨 엥겔(Gelson Engel) 목사였다. 우리들에게는 왕길지 목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왕길지 목사는 1900년에 한국에 도착한 뒤 37년간 머물면서 선교정책을 세우는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3년에는 우리 교단의 제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부터 시작해서 1937년까지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면서 신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왕길지목사도 독일 뷔템베르크에서 태어나서, 스위스 바젤과 영국 에딘버러에서 수학했다. 처음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것은 스위스의 바젤선교회였으나, 선교지인 인도에서 감리교선교회로 이적하였다. 그곳에서 1894년에 호주인 교사였던 클라라 바스 양과 결혼한 뒤 질병에 시달리는 부인을 위해서 호주로 돌아갔다. 왕길지 목사는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한국에 왔다. 왕길지 목사야말로 국적과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칼한 선교사였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호주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에큐메니칼 정신에 기초해서 통전적인 선교를 했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 버림받은 사람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선교를 했다. 19세기 말엽부터 호주 사회는 세속주의 경향을 보여서 종교적인 무관심이 확대되었다. 반면에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복음주의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호주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복음과 사회복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등의 신학적 편가르기에서 벗어나서 타교파와 협력하는 것을 배웠다. 호주 선교사의 주류를 이룬 기독학생운동 출신 선교사들은 이미 캠퍼스 선교를 위해서 협력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선교지에서 통전적인 선교를 펼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진주에서 백정들을 교회에 받아들여서 그들을 신분차별에서 해방시켰다. 부산에는 1910년부터 나환자요양소를 운영했고, 1960년대부터 80년대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인권보호와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리차드 우튼 목사(우택인)는 신군부에 의해서 사형 판결을 받은 김대중 전대통령 구명운동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둘째는 초기에 여자 선교사들이 큰 공헌을 하면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선교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죽고 그의 누이 메리 타보르 데이비스가 1890년에 호주로 돌아간 뒤 호주 장로교회는 1891년에 제임스 한나 맥케이 목사 부부와 세 명의 미혼 여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했다. 이 세 명의 여선교사들은 첫 사업으로 부산 길거리에서 버려진 고아 소녀들을 데려다가 고아원을 설립했다. 1900년 10월 29일에 왕길지목사가 부산에 도착해서 짐을 푼 것도 이 고아원 바깥 마당이었다. 왕길지목사는 부산에 도착한 뒤 석 달 반 만인 1901년 2월 10일에 41명의 어른과 27명의 어린이에게 첫 세례를 주었다. 이 때 왕길지목사는 세례 문답을 하면서 먼저 여성들부터 문답을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문답을 한 이도 여자들과 고아원의 소녀들이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여자들과 소녀들이 수예품 따위를 만들어서 자립할 수 있도록 '산업부'를 세웠다. 통영에는 버림받은 부인들이나 매매춘 소녀들, 장애인 소녀들을 보살피는 농업실수학교를 세웠다. 서울에서는 매춘의 위기에 처한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서 은혜의 집을 운영했다. 이들의 보살핌으로 인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성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진주에서 백정들을 받아들일 때 교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한 이들도 여성 선교사들이었다. 또, 호주에서 미혼선교사들을 모집해서 파송한 것도 장로교여선교연합회였다. 이들은 호주에서 선교소식을 전하고 선교후원금이나 선교물품을 모으는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호주를 비롯한 서구 기독교회는 갈수록 퇴조를 보이고 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경향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우스트로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연간 약 5%씩 교인이 줄고 있다고 한다. 매 10년마다 교인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비율이다. 이미 40년 가까이 계속된 교인 감소추세는 교회의 치명적인 약화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게다가 교인들의 초노령화 현상으로 지도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호주교회도 문을 닫는 교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선교사를 해외로 보낼 꿈도 꾸기가 힘든 처지이다. 해외선교는 정부의 해외개발자금을 받아서 제3세계에서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서구의 여덟 개 기독교 국가들은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였다. 19세기 선교운동의 못자리에서 싹이 터서 자라났다. 20세기 후반부터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성령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고, 제3세계 교회들이 성장했다. 공산국가였던 중국교회의 교인수가 이미 한국의 인구를 능가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주류 교회가 아닌 초교파 독립교회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촛대를 옮기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21세기의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도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WCC의 다음 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된다. 과거 호주선교부가 선교 초기에 담당했던 선교지이다. 자연스럽게 호주교회도 관심을 갖고 있다. 부산 총회가 21세기를 여는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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