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죄인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칼빈의 칭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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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9일(목) 10:28
신정우 / 새문안교회 부목사

종교개혁에서 칭의론은 종교개혁 이론 가운데 금강석과 같은 교리이다. 루터는 칭의 교리를 "교회가 그것에 따라 서고 넘어지며 교회의 전 교리가 의존해 있는, 신앙의 기본적이고 주된 조항"이라고 보았다. 칼빈도 칭의론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신앙이 달려 있는 결정적 구심점"으로 보았다. 칼빈에게 칭의는 구원의 견실한 기초이다. 칭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중생, 믿음, 회개, 성화는 실속 없는 껍데기로 남는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회개를 많이 하며, 성화의 과정을 착실히 밟을지라도, 만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은 뿌리채 흔들리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또 칭의는 죄의 면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이다(III.2.1)."

칭의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의 디카이운(δικαιουν)을 번역한 것으로 본래 재판에서 의롭다고 선고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법정에서 유래하는 용어로 법적으로 고발당한 사람에게 재판관이 법정에서 그의 무죄를 선고하며 그가 무죄한 사람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가리켜 디카이운(δικαιουν), 곧 칭의라고 부른다.

칼빈에게서 칭의의 재료이자 기초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심으로 얻은 의이다(III.2.9). 이 의는 그 안에 어떠한 의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러기에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너그러이 받아 주시는 것이며,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다(III.2.4). 이러한 죄의 사죄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은혜의 행위이다(III.11.2). 비록 우리 자신은 어떠한 의도 우리 안에 갖고 있지 않으나, 하나님은 의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며 그 까닭에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III.11.3).

칼빈의 칭의론은 그 당시 범람하고 있던 여러 다양한 칭의론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교해지고 분명해졌다. 오시안더(Osiander)는 칭의가 우리의 의화(義化)이며 내재하는 의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는 도덕적인 모범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를 행할 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은 결정적으로 의의 주입이나 행위에 의한 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교리들의 공통된 특징은 칭의를 순전히 우리 밖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견해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칭의는 결코 내가 실제적으로 의로워지거나, 우리 내부에 하나님의 의가 점점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칼빈에게 칭의는 철저히 법정적인 것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어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만을 바라볼 때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와 순결을 입히시고, 거저 의롭다고 무죄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의 칭의론의 최대의 업적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그 누구보다도 가장 명쾌하게 잘 정립한 것이다. 일찍이 어거스틴과 가톨릭은 칭의 안에 성화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칭의 안에 성화가 들어 올 경우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심히 어렵게 된다는 데 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아직도 원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 우리의 내부에 잔존해 있는 이러한 죄악의 본성은 너무도 질기고 강한 것이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생 동안 싸워서 죽여야 한다. 이처럼 비참한 상황에서 믿음과 더불어 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이 세상 그 누가 스스로 구원을 자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루터와 멜랑히톤 그리고 칼빈에 이어지는 개혁파의 가장 큰 노력은 칭의를 성화에서 구분하여 칭의가 인간의 공로와는 상관없는 법정적 개념으로 돌림으로 칭의가 철저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사방에서 심각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칭의를 성화로부터 떼어내어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으므로 자신들이 행동을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도덕적 불감증이나 방종으로 몰게 될 우려가 있다. 칼빈은 이러한 비난을 얼마나 귀에 따갑게 들었던지 그들의 비난들을 기독교강요에 그대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III.16.1). 이러한 거센 반론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공들여 구분 지은 칭의와 성화를 또 다시 어떻게 해서든 긴밀하게 연결함으로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끌고 가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들을 충족시키며, 칭의와 성화 간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명쾌하게 해결한 이는 바로 칼빈이었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이중의 은혜'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의 심판자 대신에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흠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III.11.1)."

이러한 이중적인 은혜라는 개념은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여러 난관들을 타개할 칼빈의 탁월한 생각이었다. 칼빈의 보다 더 탁월한 점은 이 기발한 메타포를 지지해 줄 명쾌한 성서적 근거를 찾아낸 데서 발견된다. 칼빈은 그 많고 많은 말씀 가운데 고전 1장30절의 말씀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를 주목한다. 그리고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거룩하게 하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관계로 결합되어 있다(III.16.1)"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칼빈은 그리스도가 조각조각으로 나누일 수 없듯이, 우리가 주안에서 동시에 그리고 서로 결합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두 가지 은총인 의인과 성화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III.11.6)고 선언한다. 이렇게 함으로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인과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병립시킬뿐 아니라 이 두 가지 은총을 영원하고 풀 수 없는 연결체로 연합시킨다.

칼빈에게 칭의는 성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칼빈은 성화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둘을 끊으려야 끊을 없는 줄로 꽁꽁 묶어 놓는다. 이 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 칼빈은 성화를 의인에서 분리하는 것을 마치 그리스도 자신을 찢어 놓는 것과 같다(III.16.1)는 극적 표현을 사용했다.

칼빈에게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구별되지만, 분리 되지 않는(distinctio sed non separatio)" 긴밀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칼빈은 칭의를 선행의 공로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의 의로 돌림으로써 구원론에서 행위 구원의 누룩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은 물론, 칭의와 성화를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관계로 굳게 결합함으로 행여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값싼 은혜로 여겨지거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에 너무 들뜬 나머지 도덕불감증이나 율법 폐기론에 빠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칼빈의 이러한 칭의관은 성서가 말하는 칭의의 핵심을 잘 간파한 것으로, 이로써 종교개혁은 더욱 든든한 이론적 반석 위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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