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선교로의 부르심

[ 땅끝에서온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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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3일(금) 16:58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나는 대학교 끝나갈 무렵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서 성경공부하면서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졸업 후에 직장을 다니다가 1978년 12월 31일 사표를 쓰고 곧바로 오산리 순복음 금식기도원에 가서 3주간의 금식 기도를 마쳤다. 그 후 계속되는 기도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선교에로의 부르심을 재확인하고 1980년 3월에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광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84년에 이란 선교사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북방선교를 원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쪽에는 길이 열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기도하고 있던 터였다.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려는 중 이란 현지의 사정으로 선교사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많이 낙심이 되었다.

   
▲ 임성익ㆍ이계연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이때부터 나와 아내인 이계연선교사는 저녁마다 기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해 연말에 우리를 부산 동래중앙교회로 인도해 주셨다. 동래중앙교회는 담임목사이신 故 신동혁목사님도 훌륭하셨고 성도들도 좋은 교회였는데 나는 그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년 동안 부목사로 시무했다.

그런데 1987년을 맞이하면서 선교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다시 오기 시작하여 아내와 나는 자정을 전후하여 아무도 모르게 새벽기도실에 가서 6개월간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국내에서 다른 목회지가 세 곳이나 열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교를 위해 계속 기도하였는데 그 때 장신대 오성춘교수님이 전화를 주시더니 "파라과이에 남미한인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목회하면서 선교도 할 수 있다. 가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교사가 아닌 이민 목회자로 가기 때문에 조금 서운했지만 오직 선교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반가워서 앞뒤도 안 돌아보고 무조건 "예"를 했다.

당시 남미교회는 9개월 동안 목사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담임목사를 모시고자 했지만 비자를 받을 수가 없어서 편법을 사용해서 목회자를 모시려고 했다. 브라질 바리그(VARIG) 항공사 사장이 상파울루까지 탑승을 허락하는 팩스 한장을 보내면서 이 팩스를 갖고 바리그항공을 타고 상파울루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오면 아는 사람이 와서 파라과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진하게 그렇게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팩스로 나와 함께 가는 심방전도사와, 교육전도사 가정은 무사히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7번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가 짐을 정리하느라 맨 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를 안내하신 분이 우리에게는 미처 7번 문 이야기를 못했던 것이다.

또 한 번 낙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계셨다. 그날 처가로 돌아가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잠을 깬 후 총회 세계선교부에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더니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장신대 선교훈련원에서 총회 파송 선교사 훈련을 하고 있는데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4년 전에 이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이미 총회에서 선교사 인선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선교사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제4기 선교사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훈련이 끝나갈 무렵 그렇게 안 나오던 파라과이 비자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민 목회자가 아닌 총회 파송 선교사로 파라과이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파송교회가 없어서 선교훈련 동역자인 이병일선교사가 파송받는 중랑제일교회에서 꼽사리끼고파송만 받았다.

비록 후원을 해주는 교회가 없었지만 우리는 마냥 감사하고 기쁨에 벅차 있었다. 이 조그만 체험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라과이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파라과이로 출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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