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당신들은 우리의 영적 부모님입니다"

[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생존 선교사 인터뷰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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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2일(목) 10:02
변창배 / 멜본 서부교회 목사

   
▲ 첫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의 후손들(앞 줄)과 변창배목사(뒷줄 가운데).
한민족이 걸어온 지난 1백20년은 생존의 위기를 넘나드는 격동의 세월이었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의 월남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번의 국제전에 휘말렸다.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청일전쟁이나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겨룬 러일전쟁을 비롯해서 의병전쟁, 독립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하나하나가 가히 제국간의 전쟁이었거나 제국과 겨룬 전쟁이었다. 특히 냉전의 서막을 연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군대가 최초로 교전한 국제전이었다. 한민족은 열 차례의 국제전을 치루는 사이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한민족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호주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내셨다. 멜본에서 첫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889년. 당시는 호주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이들의 수가 하나 둘씩 늘어서 모두 1백30명이 되었다. 이들은 강도 당한 처지에 있던 한민족을 정성껏 섬겼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다. 그들 중에 현재 호주에 거주하는 생존 선교사는 모두 29가정의 38명이다.

멜본의 호주연합교회 소속 한인교회 목회자들은 한호 선교 1백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생존 선교사를 찾아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증언을 받아 두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비디오로 촬영을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연락처를 찾는 일도 막연했다. 몇 분은 선교사들에게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거주 지역도 빅토리아주, 뉴사우스웨일즈주, 퀸즐랜드주, 캔버라에 이르기까지 호주 대륙의 절반에 해당할 만큼 광활했다. 연락처를 찾고, 촬영기사와 인터뷰 담당자를 정하는 데도 몇 달이 걸렸다.

그 사이에 호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인터뷰 동의서를 준비하고, 모범 설문지를 작성했다. 영상으로 인터뷰를 기록하기에 주로 개인적인 소감을 담기로 했다. 가급적이면 인터뷰에 각 교회의 교인들을 동행하기로 했다.

드디어 6월 25일에 발라랏에 거주하는 알비나 맥납 선교사(맥비나)와 첫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9명의 멜본한인교회 교인들이 함께 방문했다. 맥납 선교사는 93세의 할머니셨다. 1950년 4월에 한국에 와서 1968년에 귀국할 때까지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련을 함께 겪었다. 한국장로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으로 가슴앓이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양로원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있었다. 귀가 불편해서 잘 듣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정정했다. "한국하면 쌀밥, 계란, 사과가 생각이 난다"면서, 아직도 김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에 시작된 인터뷰는 10월 11일에 멜버른에서 한호선교 1백20주년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념행사를 마감할 때 일단락되었다. 그 동안 24명의 인터뷰를 영상에 담았다. 7월 30일에 인터뷰한 헬렌 맥켄지 선교사(매혜란)는 9월 18일에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우리의 인터뷰가 마지막 영상이 된 것이다. 멜본한인교회의 김인년 씨와 김주혜 씨가 전체 촬영과 인터뷰를 담당했다. 멜본한인교회, 딥딘연합교회, 한빛교회, 멜본서부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참여했다. 필자도 멜본과 뉴카슬, 시드니에서 9명을 인터뷰 하는데 동행했다.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이지만 얻은 성과가 적지 않다.

첫째는 선교사들에게 한국교회를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첫 인터뷰를 한 맥납 선교사에게 "한국교회는 당신의 수고를 잊지 않고 있다"며 "전에는 당신이 한국을 찾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찾아왔다"고 말하자 얼굴이 환해졌다. "영적으로는 우리들이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믿는다"고 하자 "고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선교사들에게 똑같은 감사인사를 전했다. 선교사들도 한결같이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화답했다. 모두들 "한국과 한국교회의 발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서 "한국교회가 세계를 잘 섬겨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도리어 한국교회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존 브라운 목사(변조은)는 "은총을 전하려고 온 사람들이 은총을 입고 떠났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리처드 우튼 목사(우택인)는 "내가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우튼 목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동안에 민중선교에 대해서 눈을 떠서 평생을 그 길로 매진해서 2000년에는 여러 나라의 인권에 기여한 공로로 호주정부로부터 호주훈장을 받았다. 도로시 언더우드 교수(원성희)도 "준학사 학위 밖에 없던 나를 공부시켜서 명문 이화여대의 명예교수가 되게 했으니 내가 한국교회에 빚을 진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언더우드 교수는 44년간 한국에서 섬겨서 호주 선교사 중에서는 최장기간 체류한 선교사가 되었다.

셋째는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칼 정신에 기초해서 통전적인 선교를 했음을 확인했다. 해방 이후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기독학생운동(SCM) 출신이었다. 이들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선교에도 힘을 쏟았다. 스티븐 빅터 라벤더 선교사(나병도)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1976년에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으며 6개월간 저임금 노동자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노동자들의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서 낮은 자리에 선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호주 선교사들은 의사든 교수든 관계없이 똑같이 소박한 사례를 받았다. 언더우드 교수는 이화여대의 교수로 받는 봉급을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로 보내고, 자신은 다른 선교사와 똑같은 사례만을 받았다. 호주의 에큐메니칼 인맥에서도 한국선교사 출신 인사들이 굵은 선을 이루고 있다.

넷째로 선교사들은 호주로 귀국한 뒤에도 한국과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기여했다. 알란 스튜어트 목사(서두화)는 귀국한 뒤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일하면서,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인 멜본한인교회의 초대목사로 섬겼다. 리처드 우튼 목사는 한국을 떠난 뒤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본인 스스로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호주로 돌아온 뒤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더 많이 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도 멜본한인교회의 협동목사로서 12년째 영어 사용자를 위해서 목회를 하고 있다.

존 브라운 목사는 호주연합교회 선교위원회 총무의 중책을 맡으면서 시드니의 한인교회들을 도왔다. 이런 분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호주 한인사회와 한인교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터뷰 영상은 기념행사를 위해서 5분에서 12분 길이의 짧막한 비디오 클립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1백20주년 기념행사 홍보영상, 선교사 감사잔치를 위한 영상, 기념대회용 영상 등이 그것이다. 앞으로도 몇 분을 더 인터뷰하고 이번 기념행사 영상을 종합해서 최종적으로 5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인터뷰 원본 영상물은 한호 선교의 역사기록으로 연구자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이다. 고통 당하는 이웃을 찾아서 섬김으로써 이들의 선교정신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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