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뿌리부터 바꾼 개혁자'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36)칼빈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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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9일(목) 10:25
박경수 / 장신대 교수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루터의 영향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덴마크ㆍ노르웨이ㆍ스웨덴)에 국한되었고, 츠빙글리의 사상이 취리히와 스위스 몇몇 도시에 영향을 미친 것에 반하여, 칼빈의 사상은 제네바를 위시한 스위스 지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폴란드 등의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 뉴잉글랜드를 거쳐 한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은 단지 신학과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방대한 영역에까지 미쳤다. 칼빈주의야말로 국제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사상의 완성
시기적으로 보자면 칼빈은 종교개혁 1세대였던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2세대 종교개혁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처음 시작했던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더 큰 틀에서 객관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위상을 조망할 수 있었고, 앞선 선배들이 드러낸 약점들을 보완하고 종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이 넓은 안목으로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종합하려고 했다는 것은 다음의 몇 경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첫째로, 칼빈은 성만찬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던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을 중간에서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칼빈은 루터의 정(thesis)과 츠빙글리의 반(antithesis)을 조화시켜 하나의 합(synthesis)을 만들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영적 임재설로서 루터의 육체적 임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로,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너무 강조한 결과, 프로테스탄트는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가르친다는 온갖 오해와 억측이 생겨난 측면이 있었다. 이에 칼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셋째로, 루터가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둔 반면에, 칼빈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교회와 사회의 구조들도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가 2세대 종교개혁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신학적 종합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칼빈을 종교개혁 사상의 완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

참된 교회의 회복
칼빈의 사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돋보이는 것은 단연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상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1세대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교회론과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론을 만들어 낼 여유가 없었고 또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이제 로마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분리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자,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위한 독자적인 교회론이 요청되었다. 이 필요성에 부응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칼빈의 주저인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론 부분이고, 우리는 여기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을 확립한 신학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에 대해서, 교회를 지탱하고 성도를 세우는 권징에 대해서, 목사ㆍ교사ㆍ장로ㆍ집사로 이루어지는 사중직제에 대해서,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표준들을 세워놓았다. 칼빈의 평생의 관심은 '참된 교회'였다. 그는 무엇이 참된 교회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평생을 씨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내가 교회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은 이후, 나는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진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경건과 학문'을 강조하는 교육
1536년 제네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칼빈은 교육을 강조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신앙과 삶에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핵심적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빈이 교사를 교회의 항구적인 직제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교육을 중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일찍이 '교회법령'(1541)에서 고등교육 기관의 필요성을 명백하게 표현하였으며, 1559년 6월 5일에는 마침내 자신이 목회하던 생피에르 교회에서 제네바아카데미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교육의 핵심은 '경건과 학문'이었다. 제네바아카데미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온 유럽으로 전파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였다. 유럽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배운 개혁교회의 이상을 실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혁교회의 전통은 명실상부 국제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 만들기
칼빈의 개혁운동은 교회와 학교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특히 칼빈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해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고 위탁하신 것임을 알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하라고 강력하게 설교하였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복지기관을 만들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복지사역을 벌이기도 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 이미 확립되어 있던 사회복지 기관인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에 대한 성서적 전거를 마련하였다. 또한 종합구빈원만으로는 복지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따로 프랑스기금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프랑스기금은 주로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망명을 온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구였다. 이처럼 칼빈을 중심으로 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제네바에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다.

칼빈을 올바로 계승하는 방법
역사의 방향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칼빈은 서구 역사에 매우 깊은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칼빈이 서구 그리스도교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 진영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학자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들로부터 근본원리를 발견하여 그것을 우리의 상황 가운데 적용시키는 것이다. 칼빈이 자신의 시대에 그러했듯, 이 시대에 우리의 교회와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원리에 충실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칼빈의 개혁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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