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권위주의 문화, 교회가 앞장서자

[ 논설위원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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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9일(목) 10:17
신영균/목사ㆍ경주제삼교회

'짐이 곧 국가다'라고 부르짖으며 72년 간이나 프랑스의 왕권을 누린 루이 14세의 장례식장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황금관에 누운 그를 대성당 중앙에 안치하려는 순간 집례자인 사제는 관 위에 밝혀둔 촛불을 꺼 버린 후,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심이여"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인간 중심의 권위주의를 향한 충격적인 메시지였다.

우리 사회에 탈권위주의 문화가 이슈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고, 권위주의는 공공의 적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울산시는 각종 행사 때마다 내빈을 일일이 소개하던 것을 가능한 짧게 하고, 축사, 격려사, 환영사 등 인사말을 생략하기로 하였다. 할 수 없이 축사와 격려사를 해야 할 때는 가능하면 2분을 넘기지 않도록 하여 시민중심적인 행사문화를 정착시켰다. 이는 일부 하나님 중심, 회중 중심 보다 순서담당자 중심의 교회 행사들을 조명해보게 하는 탈권위주의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탈권위주의는 시대적 유행이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지식정보산업사회에 있어 조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선진국들이 선진국인 이유는 이미 오래 전에 탈권위주의와 그 시스템을 정착시켜 조직 혁신과 선진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 청산 문화를 뿌리 내리고 선진국형 시스템을 갖추어 가고 있는 상황에 교회는 권위주의의 그늘 아래서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면 사회를 결코 이끌어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 구원 역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혼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권위(權威)'는 존경하여 지도자를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래서 모든 것을 위임하고 몰입하며 따르게 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권위주의(權威主義)'는 자기권위 그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하거나 혹은 자기권위에 반항하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양식이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권한의 위임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직위나 어떤 체제에 기대어 행사하는 권력행위을 의미한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독선이 가득차고, 군림하며, 일방적이고, 하향적이며 지시적이고, 항상 비판적 성향을 나타낸다. 이와는 정반대로 탈권위주의는 존경과 몰입, 그리고 쌍방향적 교류와 수평적 의사전달 구조를 정착시켜, 섬김과 배려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간다. 니버(R. Niebuhr)는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다섯 가지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곧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권위주의의 행태와 문화를 섬김과 배려의 문화로 변혁하는 일에 있어서 세상보다 앞장서 나가야 한다.

권위주의가 몸에 배어있는 모습이나 교회체제, 교회직제에 대한 권위주의적 의식, 교회회의에 스며든 권위주의,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항존직 사이의 계층의식,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직위만 내세우는 권위의식, 자신의 명예를 위해 노회장, 총회장을 획득하려는 행태, 가운이나 교회건물 구조 그리고 각종 교회명칭에 붙어 있는 권위주의적인 면모들은 탈권위주의 사회에 별로 희망이 없는 모습이다. 더구나 권위주의와 권위의 혼돈과 착각으로 그것이 권위주의인지도 모르고 마음껏 권위주의를 부려 갈등과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교회를 얼마나 손상시키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장애가 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카리스마가 있어야 된다'고 부르짖는 교회 지도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막스 웨버(M. Weber)가 규정한 카리스마(charisma)는 원래 헬라어 '카리스', 즉 '은혜'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은혜없는 카리스마는 권위주의 중의 권위주의이며, 은혜가 토대가 된 카리스마는 주님의 모습을 닮아 주님의 권위를 가진 존경받는 교회 지도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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