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자여 내게로 오라'

[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한국과 나환자들을 사랑으로 품은 '매견시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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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2일(목) 10:50
정병준 / 호남신대 겸임교수


매견시(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는 스코틀랜드의 유 섬(the Isle Ew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2년 무디 부흥집회에서 목회자의 소명을 갖게 되었고, 1891년 존 모트의 연설을 듣고 나서 학생자원자(Student volunteer)로 서원했고, 1894년 12월 7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뉴헤브리데스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선교지에서 15년을 섬겼다. 그의 아내는 1908년에 흑수열병(Black-water fever)으로 선교지에서 사망했고 이듬해 자신도 질병으로 물러났다.

   
▲ 거리에서 구걸하는 나환자들.
그후 매견시는 1909년 5월 곧 바로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비록 해외선교위원회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재정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에게 일 년 간 사례비 없이 섬길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즉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그의 열정에 감동해서 “어린이선교단”(The Young People's Mission Band)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한국으로 파송했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1910년 2월 21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1912년 2월 10일에 매리 켈리(Marry Kelly) 선교사와 결혼을 했고 부산에서 총 29년의 선교활동을 하였다.

매견시 목사는 부산, 동래, 기장, 울산, 온양 지역을 순회하였고 지역교회를 보살폈다. 그는 1912년에는 20개의 교회를, 1916년에는 52개 교회를 관할했다. 그는 울릉도를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였다. 그는 자신의 방문이 한국인에게 누가 될까하여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는 1912년 5월부터 부산의 감만동에 있는 나환자요양소 상애원의 원장을 맡게 되었다. 상애원은 원래 미북장로회가 호주장로회가 함께 운영했으나 1916년부터는 호주장로회가 완전히 단독으로 운영을 하였다. 나환자들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대중들에게 '천형'(天刑)으로 알려졌고 치료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매견시 목사는 그 사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1912년에 상애원에는 54명의 환자가 있었으나 1916년에 1백50명, 1926년에 4백50명, 그가 은퇴할 때인 1937년에는 6백명으로 증가했다. 부산 상애원은 1928년까지 4천2백60명의 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했다. 그러나 입소를 원하는 환자들이 점점 늘어갔고 상애원 입구에는 나환자촌이 형성될 정도였다. 매견시 목사는 겨울철에 입원을 원하는 환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라고 진술했다. 그가 신앙양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상태가 나쁜 환자들을 선택하여 입소시키는 것이었다.

매견시 목사는 1913년에 멜번의 투락교회와 존 매크레이 목사의 도움을 받아서 여성환자들을 위한 숙소를 건축했다. 1920년에 호주인 머레이 여사(Mrs Murray)가 전재산을 헌납하자 '머레이관'을 건축했다. 그는 1926년에 나병원을 세웠고 1934년에 새로운 건물병원을 지었다. 매견시 목사는 꾸준히 공부해서 1931년에 국가시험을 치루고 지역의사 자격을 획득했다. 매견시 부인 켈리는 나환자 부모들의 아이들을 격리시켜 기르기 위해 1919년에 '미감아의 집'을 세웠다. 1931년에는 18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환자들의 대부분은 복음을 영접했다. 그들은 입소한지 6개월이 지나면 대개 글을 읽고 신약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1921년 초 상애교회에는 1백11명의 세례교인과 40명의 학습자들이 있었고 1931년에는 2백34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환자들은 놀랍게 변화했다. 1919년 많은 재감자들이 입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기들은 퇴원하여 4~6개월간 구걸하면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매견시 목사는 그들에게 재입소를 약속했다.

그는 나병 치료의 성공은 '믿음, 기름, 노동'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5년에 대풍자유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환자들의 사망률은 평균 25%에서 15%이하로 줄어들었고 1923년에는 2.3%로 줄어들었다. 그는 재감자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체력을 보강하도록 했다. 재감자들은 자신들의 숙소와 교회를 스스로 건축했다. 매견시 목사와 다른 나환자 선교사들은 나병의 전염방지와 환자치료를 위한 해결책을 총독부에 건의했으나 총독부는 1917년 소록도에 수용소를 짓고 비인간적인 강제수용을 하였다.

매견시 목사에 대한 지역교회와 주민들, 나환자들의 존경심은 대단히 깊었다. 상애원 식구들은 1930년에 매견시 목사 한국선교 20주년을 맞이하여 화강암 기념비를 부산의 좌천동에 세웠고, 한국사역 25주년에는 수개월 동안 준비한 철제기념문을 세웠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전도자를 파송하면서 "매견시 기념전도사"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

매견시 목사는 1938년 2월 18일 부산을 떠났고 이듬해 6월 30일에 선교사직에서 공식 은퇴했다. 1940년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호주의 이민정책, 백호주의를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매견시 목사의 두 딸 헬렌 맥켄지와 캐서린 매켄지는 부모의 뒤를 이어 1952년 한국에 와서 부산에 일신병원을 세우고 청춘을 한국의 어머니와 신생아들을 위해 바쳤다. 그는 진정 선교의 사람이었고 그 가족은 대를 이어 한국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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