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9~24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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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4일(수) 13:49

월-30배, 60배, 100배
본문: 마 13:1-9
찬송가: 288장(구 204장)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 심으면 싹이 나고 줄기와 잎이 자란 후에 꽃피고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생명이 있어서 삼십 배·육십 배·백 배로 결실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심으면 현재의 삶보다 삼십 배·육십 배·백 배로 더 의롭게 살 수 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성결하게 살 수 있다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의지하면 삼십 배·육십 배·백 배로 성결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또 현재보다 삼십 배·육십 배·백 배로 복을 누릴 수도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그의 아들 이삭도 농사를 지어 백배의 소출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창 26:12-14).
 
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열매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농부는 땅을 갈고, 돌을 고르며, 잡초를 뽑아 내면서 쓸모없는 땅을 옥토로 만든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려야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마음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악하고 세속적인 마음을 갈아엎고, 탐심을 다 뽑아내어 옥토를 만든 후,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때에야 비로소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삼십 배·육십 배·백배의 결실을 맺게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그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가꾸게 하시고, 그 어떤 주님의 말씀도 아멘으로 받아들여서, 그 생명의 능력이 삼심 배·육십 배·백배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석 우 목사
성도교회 시무


 

화-가정이 회복되는 길
본문: 창 2:16-17
찬송가: 285장(구 209장)

가정마다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진 근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 법도가 깨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최초의 법도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도 지켜야 할 예의와 법도가 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법도가 깨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통제불능의 폭주 기관차처럼 죽음을 향하여 마구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온갖 탈선이 자행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말할 수 없는 죄악들이 저질러지고 있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불신앙을 양산해 내고 있다. 결국 사회는 점점 타락하고, 학교 교육은 붕괴되었으며, 행복해야 할 가정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통곡소리가 들리는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어떻게 가정다운 가정을 만들 수 있을까? 에덴 동산에 4개의 강이 흘렀던 것처럼 오늘날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도 4개의 강이 흐르게 하면 된다. 첫째,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강.둘째, 가정의 울타리가 되어줄 남편의 강. 셋째, 샘물 같이 솟아오르는 아내의 강. 넷째, 정금 보석처럼 빛나는 자녀의 강이 흘러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보혈로써 죄사함을 받으며 잃었던 믿음과 사랑을 되찾고 가정의 법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너진 가정을 치유하여 주소서. 무너진 가정의 법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발판 위에 다시 세워지게 하소서. 원망 불평 가득하던 가정이 사랑과 평안이 있는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 득 섭 목사
늘사랑교회 시무


 

수-풍랑 위로 걸어오시다
본문: 마 14:22-33
찬송가: 406장(구 464장)

이세상은 알고 보면 위험한 곳 투성이다. 물이 좋다고 찾아갔다가 익사하고, 조상의 묘에 벌초하러 갔다가 뱀에 물리고 벌에 쏘여서 죽고, 좋은 차 샀다고 즐겁게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등 많은 곳에서 어려움을 당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여지는 세상의 것에 염려하지만 성경은 영적인 문제, 즉 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 죄는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여 멸망으로 끌어 내린다. 그런데 죄에 빠져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이 풍랑 위로 걸어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 풍랑을 만나면 사람들은 우리를 피하지만 주님은 수많은 풍랑, 시험과 환난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다. 풍랑을 다스리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주와 함께 걸으면 물위도 걷고, 산도 넘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승리할 수 있다.
 
성경 속 믿음의 선진들은 풍랑이 일 때에 쓰임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 풍랑 중에 위로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러므로 나의 부족한 것이나 못난 것을 생각하지 말자. 풍랑이 일 때에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자. 그때 풍랑 위로 걸어오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풍랑 위를 걷게 하는 놀라운 기적과 복을 주신다.

오늘의 기도

 피할 수 없는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늘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 성 욱 목사
일산명성교회 시무

 


 

목-렘브란트를 만나다
본문: 눅 15:11-32
찬송가: 527장(구 317장)

성경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성화는 단순한 그림을 뛰어넘는다. 절대자를 향한 마음의 창인 것이다.
 
필자의 교회 현관에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란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네덜란드 천재화가, 빛의 화가로 불린다. 돌아온 탕자는 그가 죽던 해인 1669년에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머리나 손재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그 삶을 움직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림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다. 겉옷도 입지 않은 작은 아들은 속옷마저 걸레조각이다.  뒷모습에선 황량함이 어려 있다. 발은 뒷창이 없어 지치고 힘든 인생길을 느끼게 해준다. 머리는 삭발한 죄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안에 덮석 안겨있다.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모습이다.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큰 아들은 키가 크고 엄한 모습에 교만함이 묻어 있다. 무감동, 무반응, 무기쁨의 모습이다. 집 안의 탕자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어수선한 마음이다. 마음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이다.
 
아버지는 얼굴과 손에 빛이 가득하다. 눈은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자비의 눈이다. 등을 굽혀 양손으로 아들을 감싸고 있다. 한 손은 부드럽고 섬세한 곱상한 여성의 손이며 다른 손은 힘 있고 거칠고 투박한 남성의 손이다. 지독한 사랑과 정의의 손이다. 성취와 업적만을 가치로 내세우는 현실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동시에 품어주는 배짱 좋은 그분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 헌 권 목사
서정교회 시무

 


 

금-섬김의 삶을 살자
본문: 마 20:28
찬송가: 212장(구 347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셀 수 없이 많으나 크게 두 가지를 꼽아볼 수 있다. 첫째는 십자가의 구속(속량)사역이며, 둘째는 제자를 삼은 사역이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베드로의 유혹만이 아닌 여러가지 견디기 힘든 시련도 있었는데 그 중 아버지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신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소망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면서 3년 동안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셨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인 '대속물'과 '섬김'의 요지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이제는 성숙된 작은 예수가 되어 삶의 현장마다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텐데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개인이나 교회가 안주하여 죽음 후의 천국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야 할 때이다. 어린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듯 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이땅에 섬기기로 오신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본받아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가 되자! 그런다면 우리의 가정, 사회, 인류가 소망이 있다. 세상은 온통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만연하다. 예수님은 목수셨지만 정작 본인을 위해서는 방 한 칸 짓지 않으셨으며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피와 물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주시며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셨다.
 
옳고 그름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섬김의 은사를 실천함으로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허물많고 죄많은 우리에게 죄의 속량의 은혜주셔서 천국백성 삼아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제자의 삶인 섬김의 삶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용 섭 목사
완도주사랑교회 시무



 

토-믿음 성장의 원리(3)참으라
본문: 히 12:7-10
찬송가: 391장(구 446장)

고난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 죄로 인한 고난이다. 죄를 지은 결과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면 고난이 오는 법이다. 셋째는 이유 없는 고난이다. 고난을 당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데 고난이 오는 것이다.
 
욥은 이유 없는 고난을 당했다.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다. 자녀들의 생일 잔치 후에는 꼭 속죄 제사를 드렸다. 혹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지었을까 해서였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까지 잃었다. 왜 경건한 욥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했을까? 그러나 욥은 인내했고, 마침내 인내로 큰 상을 얻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적이 있는가? 또는 현재 이유없는 고난 중에 있는가? 인내하고 있는가? 혹은 인내할 수 없는가? 참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육신적 또는 정신적, 영적 고통이 있다. 게다가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그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할까? 참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 참는다고 무슨 유익이 있을까?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더위를 참고서 마침내 가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곡식들을 보라. 어떤 시련이 와도 참을 때 믿음이 성장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훈련)를 받기 위함이라(7절)." "징계(훈련)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8절)." 훈련은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이기에 참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0절)."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믿음의 훈련을 잘 참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 영 태 목사
안동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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