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회 총회 아침예배 설교<요약>

[ 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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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30일(수) 10:45

▶ 둘째날 <9월 22일>         '오직 성경만으로'

   

칼빈은 한 시대만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유럽사회는 종교적인 분위기로 넘쳤났다. 하지만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락했었다. 그때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들은 오직 성경만이 진리의 기준이며 규범임을 말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로 돌아와 장로교의 정체성을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개혁신앙의 아름다운 전통을 주셨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루터는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라고 했다. 칼빈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혜는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말씀을 제쳐놓고 다른 길로 갈 때 아무리 애써도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성경이 옳다 하면 옳은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진리를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만으로 부족하다 생각하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돈과 여론이 필요하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모든 것에 충분하다. 성경의 영감성 문제가 아니라 충분성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시편 19편은 자연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하고 확실하다. 이러한 성경의 충분성을 알아야 한다. 성경말씀만으로 시험을 이기는 것도 충분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것은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가 세상처럼 변질된다는 뜻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바울은 고통의 날에 대처하는 것이 성경만으로 가능함을 알려준다.

전도전략을 논할때도 말씀을 떠나있으면 안된다. 명목적 신도는 만들 수 있으나 진정한 신앙인은 못 만든다. 전도대회를 조직하거나 기적과 이사를 통해 복음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만으로는 안된다는 확증이나 다름없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얘기를 통해 보자. 죽은 자가 살아난다해도 권함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바르게 가르쳐질 때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미국 대형교회 중 하나가 달라스 침례교회다. 그 목사는 부임 1년 만에 교회 앞에 선언했다.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까지 순서대로 설교하겠다고 선포했을때 교인들은 놀랐다. 하지만 그 결과 지금은 수천명이 회심하고 헌신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성화를 보자. 로마서 6장 11절에 보면 성경은 우리를 죄에 대해 죽은 자라 한다. 이 감격과 기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경 안에서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어찌해야 할까. 말씀을 읽고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조성하신다. 그때 기쁨으로 순종하면 된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도 없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이미 다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신다.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중생케하시고 양자삼으시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고 계심을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 모든 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충분히 제시되고 있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도 오직 말씀만으로 가능하다.

1535년 제네바는 로마가톨릭과 결별 선언을 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제네바는 폭력과 간음, 악의 소굴이었다. 의회는 매일 모여 법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개혁되지 않았다. 이듬해 칼빈이 제네바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런데 초청만 했지 사람들이 지지를 안했고 칼빈은 1년 동안 무시당하며 생활비도 받지 못했다. 1541년 칼빈의 손에는 성경만이 있었다. 제네바는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됐다. 이 변화의 흐름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로 옮겨갔다. 칼빈은 서양 근대화 사건에도 공헌한 사람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오늘날 복지국가 제도를 창시한 사람 또한 칼빈이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 의학 과학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왔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장로교 정체성 회복은 하나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각인하자.


▶ 셋째날 <9월 23일>                        '바보가 되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바보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바보 같은 길을 걸었다. 그 얼굴에 침을 뱉어도 침묵을 지키는 바보처럼, 주먹으로 혹은 손바닥으로 그 얼굴을 쳐도 눈만 껌벅일 뿐 입을 열지 않는 바보 같은 주인공이었다. 옷을 벗기고 채찍을 가해도 말없는 동물처럼 신음도 없으셨던 그분이 끝내 하신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였다. 영특한 현대인의 눈에는 분명히 바보스런 부르짖음이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눈앞에서 희롱하고 기고만장한 무리들을 단숨에 거꾸러트릴 수 있는데도, 끝내 당하기만 하셨다.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가장 사랑하는 제자마저 저주하며 부정해도 한마디의 책망을 아니하시던 그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들은 명예도 모르는 바보, 돈도 모르는 바보, 통치의 개념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주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바보, 원수를 사랑하는 바보, 나를 모함하고 짓누르는 사람 앞에서도 멍청한 미소를 짓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주는 바보. 이러한 바보들이 우리 성총회에 가득히 등장될 때만이 한국의 교회가 산다. 이 민족 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뚝 솟게 된다. 그러나 진실에는 바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예언적 사명을 감수해야 할 곳에는 용기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라는 94회 총회의 주제를 앞에 놓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은 어떤 사건이나 행사를 통하여 기쁨을 받으시는데 주안점이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을 먼저 찾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은 바보의 길 걷기를 외면한다. 야고보와 요한과 그 어머니보다 훨씬 더 영특한 길을 걷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매우 명석하다.

'주는 섬김'과 '받는 섬김' 중 많은 목회자들은 '받는 섬김'에 기울어지기 쉽다. 영리한 목회자는 '받는 섬김'에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으나 바보 같은 목회자는 멍청하게 늘 '주는 섬김'에만 종사한다. 자신의 물질도 시간도 육체마저도 '주는 섬김'에만 열심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누가 나에게 섬김을 더 많이 주었느냐에 따라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섬김이 가득히 쌓였을 때 모두가 행복해 한다. 바로 여기서 뇌물이 생기고 검은 돈이 생긴다. 부패의 싹이 자란다. 반면 '주는 섬김'이 가득한 곳에는 사랑과 평화와 성결이 가득하다. 우리 목사, 장로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받는 섬김에 무관하고, '주는 섬김'에만 열중한다면 이 땅의 정의도 평화도 부정의 추방도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 확장하는데 놀라운 기여를 할 수 있다.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 'diakonos'의 본뜻은 남의 명령을 받들어 실천하는 존재를 뜻한다. 즉, 남을 향하여 명령하는 위치의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지시를 받아서 수행하는 섬김의 신분을 말한다. 서로가 높은 서열에 앉기를 원하고, 거기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어휘였다. 위대하게 되어 세도를 부리고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봉사하고 섬기는 길을 걷도록 명령하시는 주님 앞에 그 제자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철없는 요청과 거기에 따른 제자들의 분노를 보시면서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종으로 번역된 'doulos'는 노예 또는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에게 종처럼 매어 있었던 농민들에게 사용되던 말이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종에게는 자신의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모두 바치면서 섬기는데도 칭찬이 없다. 오히려 험담이 가득하다. 견딜 수 없는 수모가 주어진다. 분명 내가 땀 흘려 수고했는데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영광과 찬사를 받게 된다. 참으로 기가 막힐 사연들만 발생한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영광과 찬사는 종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종은 아무런 영광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다. 남을 섬기는 종의 앞에는 천박한 대우와 책망과 멸시만이 있을 뿐이다. 눈물과 땀이 있을 뿐이다.

우리 주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과정을 필연코 통과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다. 비록 그 으뜸이 이 지상에서 이룩되지 못해도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을 쳐다보고 바보스러운 종의 길을 걷도록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총회가 이러한 종들로 가득차기를 원하신다.

 

▶ 넷째날 <9월 24일>                   '고치고 세우는 사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고향 갈릴리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에 대하여 깜짝 놀라면서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깔보며 배척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며 무시했고 혈통과 학벌을 들추며 배척했고 직업을 폄하하며 배척했다. 3절에 보면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한지라"로 해설된다. 누가 감히 예수를 배척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자유로 배척한다고 할지 모르나 실제로 배척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화가 임하게 된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치고 실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배척과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생애는 핍박과 배척으로 얼룩진 생애였다. 교회가 무엇인가? 주님의 몸이다. 교회가 탄생하면서부터 쉼없이 배척과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교회를 배척한 나라, 교회를 배척한 사람은 파멸되었으나 교회는 든든히 서 있다. 성도가 누구인가? 우리가 다 주님의 지체인 교회다. 지금 한국은 안티 기독교 세력이 한국교회에 상처를 내고 교회의 사역들을 매도하는 일이 극에 달한 상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지만 끝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갈릴리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 배우지 못하고 천한 직업을 가진 목수라고 했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비틀어진 마음이 문제이지 사실을 말한 것으로, 예수님은 고치고 세우시는 목수였다. 예수님이 세상 오시기 전 우주를 설계하신 설계사였고, 건축하신 건축가였다. 세상에 오셔서는 30년간 갈릴리에서 목수로 일하셨다. 가구를 고치고, 집을 세우는 목수의 일을 하셨다. 공생애 3년간은 '인간 목수'로 병자를 고치셨고 마음상한 자를 치유해 주셨다. 바른 인격자로, 바른 신앙인으로 세워 주셨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도 실족한 사람들이 되었다. 예수님을 어떤 자세로 만나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겸손한 자세로,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세로 만나기만 하면 잘못된 부분은 고쳐 주시고 모난 부분은 깎아 주셔서 온전한 인격자로, 주님이 쓰시는 신실한 일꾼으로 세워주신다. 목수의 눈으로 보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목수이신 주님, 저의 모난 성격, 주님의 손에 있는 대패로 한번 밀어 주십시오. 목수이신 주님, 저의 못된 고집과 혈기, 주님의 톱으로 잘라 내 주십시오. 목수이신 주님, 저의 상처 입은 마음, 절망과 좌절에 빠진 저를 한번 안아주십시오. 목수이신 예수님 저의 병든 육체를 한번 만져 주십시오. 목수이신 예수님 저의 자녀를 한번 다듬어 주십시오. 주님 보시기에 지도자답지 못한 인격과 믿음, 목사와 장로답지 못한 언행이 있다면 고쳐주시고 바로 세워 주십시오."

목수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서 집을 세운다. 하나는 기둥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들보다. 예수님은 목수였기 때문에 이 두가지 원리로 우리를 교훈하셨다. 하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믿음의 기둥이며 또 하나는 나와 이웃과의 사랑의 대들보이다. 나에게 믿음의 기둥이 부실하지는 않은가? 또 나에게는 사랑의 대들보가 허약하지는 않은가를 살펴야 한다.

우리 목사 장로들은 교회 생활과 인간관계에서 생각과 습관이 수직적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섬기기보다는 존경받으려 하고 수평관계에서의 사랑보다는 순종을 강요하고 상하의 구별을 좋아하는 수직적 인간관계에서 목회와 치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N세대라고 한다. 디지털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인 돈 탭스콧은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는 길은 옆 사람과의 소통이라고 했다. 나와 이웃과의 소통이 없이는 N세대를 살아갈 수 없다.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나와 같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치고 세우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신다. "네가 고침 받고 세움 받은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는 나가서 고치고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즉 작은 목수가 되라고 하신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이혼율 1위다. 우리 주변에는 고침 받아야 할 이웃이 많다. 모두 우리가 아픔을 싸매주고 보듬어 주고 인격과 믿음을 바로 세워주어야 할 대상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짐이 되는 사람이며, 둘째는 힘이 되는 사람이고, 셋째는 본이 되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고침 받고 주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종들이다. 이제 고치고 세워주는 주님의 작은 목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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