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육의 巨木 왕길지선교사

[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② 한국을 사랑한 호주인 선교사(1)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22일(화) 10:41
   
▲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는 왕길지선교사가 신학생들에게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진은 왕길지선교사와 헬라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왕길지 선교사는 초기 경상남도의 교회설립과 교육, 평양신학교의 교육에 주춧돌을 놓은 거목이었고, 차세대 호주선교사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겔손 엥겔(Gelson Engel)은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비템베르크(Wuthemberg)에서 태어났다. 뷔템베르크는 바젤선교회를 탄생시킨 경건주의 운동의 산실이었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교사대학을 졸업했고, 바젤선교회에서 3년간의 신학훈련을 받았고, 에든버러에서 특별교사훈련을 받은 후 인도의 푸나에서 6년간 사역했고, 감리교 남자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호주 출신 클라라 바스 양(Miss Clara Bath)과 결혼했다. 그는 1898년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호주에 와서 학교 교장을 역임하다가 빅토리아 장로교여선교회(PWMU) 소속의 한국선교사가 파송됐다.

엥겔 부부와 세 자녀는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3~4개월 만에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적인 언어 능력이 있었다. 

자기 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한 것은 '엥겔'과 '왕길'이 발음이 비슷했고, '최고로 좋은 뜻', 즉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후 왕길지목사는 18년 동안 부산에서 목회, 교육, 순회전도자로 헌신했다. 그는 주로 경남의 동부인 울산, 기장, 서창, 병영 등지를 광범위하게 순회하였고, 그곳에 동래평안, 동래수안, 기장동부 장전리, 금사리, 송정, 산성, 화단리교회 등 많은 교회들을 설립했다. 1909년에 그는 26개의 지역교회와 울산의 6개 신앙공동체를 보살폈다. 그는 심취명장로를 신학교에 보내 1914년에는 부산진교회 담임목사로 세웠다. 그는 1916년에도 언양의 12개 교회와 김해의 10개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 클라라는 병에 걸려 호주로 돌아갔으나 1906년 4월 2일에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7년 7월 왕길지목사는 아내의 친구이면서 안식년 중에 있던 여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당시 39세)과 멜번에서 결혼했다.

선교사에게 아내는 없어서는 안되는 조력자이며 동지였다. 그는 세 자녀를 호주에 두고 새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프랭크와 엘지가 태어났다.

왕길지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고, 1906년에는 정식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 교수가 되었다. 그는 주로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했다.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가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칠 것을 결정한 후 왕길지 목사는 최초로 영어강독과 성서원어를 가르친 교수였다. 그해 그는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이 되었다. 그는 1917년에 평양신학교의 이사 겸 정교수가 되었고, '신학지남(神學指南)'의 책임편집자로서 1918~1921년 동안, 총 13권의 책을 발간하고 27회의 글을 기고했다. 신학지남은 교육기간이 짧았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목회현장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공급했다.

왕길지목사는 일평생 언어공부를 즐겼다. 그는 성서언어인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서방현대어인 독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인도방언인 마라티어, 흰디오, 우르드어,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했고, 후일 일어도 독학으로 익혀 불편 없이 사용했다. 그는 평양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냈는데 하루는 채플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서책은 무족(無足)이라 자래(自來)하거니와 자거(自去)하지 못하는데 책이 없어졌지요."

왕길지목사는 1920년에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1934년에 아모스서를 개정했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하였고,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일했는데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미국선교사 아담스와 함께 교회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왕길지목사는 공교회 지도자로서 한국교회와 경남지역교회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한국에 와서 1903년과 1909년에 북장로회와 경남선교지 분할협정에 참여했다. 북장로회는 1914년에 경남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그는 1913년에 언더우드를 이어 두 번째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그의 성품과 지도력이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는 1921년에 선교의 공로를 인정받아 오하이오 우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D.D.)를 받았다.

1938년 왕길지목사는 70세가 되어 38년의 선교사 생활과 31년의 교수생활에서 은퇴했고 아그네스는 43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끝내고 멜번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병준목사
호남신대 겸임교수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