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전하려다 도리어 입은 '은총'

[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① 한호선교 120년의 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16일(수) 15:33
   
▲ 선교 활동 중 동네 가전제품 수리소에 들른 필자(좌측에서 두번째). 현재 필자는 호주 캔버라에 거주하고 있다.

본보는 한ㆍ호선교 1백20주년을 맞아 이 땅을 위해 헌신한 호주 선교사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고 양 교단의 에큐메니칼 협력 증진을 위해 약 3개월간 '한ㆍ호선교 120주년 기획'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호주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견한 선교사인 덕배시목사(Rev. Joseph Henry Davies)는 그의 누이인 마리아와 함께 1889년 10월 2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매우 유능하며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한국에 도착한지 불과 6개월 만에 홍역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동역자 1백30명이 호주에서 한국으로 파송되어 활동했다.
 
덕배시목사가 순교한 후, 여성 선교사 몇 분이 부산 경남 동쪽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은 외국인이 살던 부산 항구를 떠나 부산진에서 초가집을 구하여, 지금의 일신기독병원과 부산진교회 근처에 선교기지를 세웠다. 그 때 부산진 거리를 헤매던 고아 소녀 몇 명을 여 선교사들이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입히며 양육했다. 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일신학교를 세웠고, 이들이 졸업하여 교사나 전도인이나 교역자 부인으로 경남지역 초기 교회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 선교사들이 이렇게 일반인과 함께 살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부산진과 동래 그리고 경남 동쪽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일찍이 생겼다. 여 선교사들은 기장, 울산, 병영 각처에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하고 초신자를 가르쳤다.
 
1910년부터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선교부가 현지 선교사와 협의하여 소위 'Forward Movement(전방을 향한 운동)'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 무렵까지 호주 선교사들은 부산진(1892)과 초량(1893)과 진주(1905) 세 기지에 거주하며 활동했다. 1910년에는 마산에, 1913년에는 통영과 거창에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호주 선교사 41명이 각처에서 전도하며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으며, 진주의 파돈 기념 병원과 부산의 나병환자 수용소를 세웠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호주의 청년 대부분이 유럽에 파견되고 국가의 재원이 전쟁에 많이 소비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도 재원이 부족하여 선교사업을 제대로 떠받치지 못했다. 또 선교사 형제 가운데서 12명이 전사를 했고 선교사 몇 분이 군목으로 전장에 파견되었다. 동시에 선교회가 세운 학교들이 이때부터 일제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호주 교회의 재원이 부족했기에 일제가 요구하는 시설을 다 갖추지 못한 학교가 문을 닫기도 했다.
 
호주 선교회는 초기부터 미국 북ㆍ남 장로교회 선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회와 협력했으며 기타 교단과 연합사업을 해나갔다. 커렐의사(Dr. Hugh Currell)는 1913년부터 진주에 머물며 매년 3개월 동안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이비인후과 의학을 가르쳤다. 마의련의사(Dr. Charles McLaren) 역시 1914년부터 1922년까지 매년 3개월씩 정신의학과 신경의학을 가르쳤고, 1923년부터 1938년까지는 전임교수와 전문의사로 근무했다. 그의 부인(Mrs. Jessie McLaren)은 이화대학교 이사였고 이대의 정원을 도안했다. 원성희교수(Prof. Dorothy Underwood)는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이대에서 종교음악을 가르쳤다. 왕길지목사(Dr. Gelson Engel)는 1905년부터 1937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 섬겼고, 변조은목사(Rev. John Brown)와 모성태목사(Rev. Chris Mostert)가 해방 후에 몇 년씩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선교회가 완전히 총회에 흡수되기 전까지 호주 선교회는 대한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와 연세대학교 각 단체에 이사나 대표를 보내어 사업에 협력했고, 특히 성서 번역에 여러 해 동안 참여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장애자나 소외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첫 여성 선교사들이 소녀 고아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길러 장래를 열어주었다. 10여 년 후 진주에 있던 여 선교사 두 분은 백정이 교회에 참석할 것을 허락했고, 이에 대해 일반 교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날 정도로 강력히 반대했지만, 두 분이 양보하지 않고 결국 백정과 일반 교인들이 한 식구로 예배를 같이 드리게 했다. 이 사건은 백정을 해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견시목사(Rev. James Noble Mackenzie)는 1912년 나병환자 수용소를 세우고 28년 동안 예수 사랑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다. 1930년대에 선교회는 이혼 당한 여성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위해 여자농업학원을 세워 자활하도록 했다. 1960년대에 노승배목사(Rev. Barry Rowe)와 동역자 신익균장로는 양지재활원을 세워 많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 지금까지 호주 선교사들이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근로자 선교를 해왔다.
 
나는 우리 선배들을 조금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분들이 각 곳에 세운 학교가 그동안 없어지든지, 아니면 노회와 관련 없이 경영되는 것을 보고 노회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선교회가 세운 기관이 기독교와 완전히 무관해진 것을 보며, 청소년 교육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배들과 현지 교회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 최초의 호주 선교사 덕배시목사와 그의 누이 마리아 선교사 .

 
한국에서 헌신하다가 돌아온 선교사들과 한국에서 복음을 위해 생명을 잃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하는 생각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 분들은 매우 유능한 일꾼들이었다. 하지만 호주 교회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전해준 것보다는 도리어 받은 은총이 더 컸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일제의 탄압과 공산 치하에서 보여준 믿음과 충성과 인내가 호주 교회에 말할 수 없는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 선교사들이 봉사한 것의 1백 배나 돌려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 동안 호주로 이민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호주 교회에 새로운 자극과 영적 에너지를 주었다.
 
이제 한호 양국 교회가 북한선교를 위해 동역하고 있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이 모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변조은목사
前 재한 호주 선교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