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보다 시급한 선교지로 발길

[ 기고 ] <특별기고> 호주, 한국 첫 선교사 데이비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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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26일(수) 16:46

데이비스가 중국 선교사 울프가 쓴 한통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왔다는 점은 백낙준 박사('한국개신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p. 197)이래로 회자되어 왔다. 그 이후의 학자들도 이 한통의 편지에 관심을 가져왔으나 이 편지가 실린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는 23년 전인 1987년 호주 멜보른을 처음 방문한 이래 '이 역사적 문서'를 추적했으나 1886~1888년 어간의 이 잡지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의 영국교회 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와 빅토리아주 시립 도서관 내의 고문서관에서 이 편지가 게재된 '국내국외선교'를 입수하게 되어 이 '역사적 편지'를 발굴하게 된 것이다.
 
부산을 방문하고 다시 중국 복주(福州, Foo Chow)로 돌아가 1887년 10월에 쓴 이 편지는 '국내국외선교' 1888년 5월호에 게재되었는데, 이 편지에서는 부산을 두 번째 방문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비록 전도의 결실은 없었으나 문자를 아는 현지인들과 교제하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썼다. 또 이런 접촉이 시작에 불과하지만 후일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동행했던 중국인도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단지 중국인 동료는 조선인들과 말은 할 수 없었으나 한문을 아는 한국인과 필서를 나누며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어 구어체는 매우 어렵고 중국인들도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울프가 10일간 체류하면서 부산과 그 주변 지역을 돌아보았고, 한국인들이 정중하게 받아주었다고 썼다. 이곳 복주(福州)에서 한 사람의 신자를 얻기 위해 10년이라는 지리한 기간을 참고 인내했듯이, 조선의 부산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말과 함께 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인근 지역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며 선교 사역의 중심지입니다. 내년에는 좀더 힘차게 일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이곳이 호주교회가 이 이방인들에게 독자적인 선교사를 보내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라고 봅니다. 이 점은 숙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한통의 편지는 인도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던 데이비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인도보다 더 시급한 곳이라는 확신에서 데이비스는 한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1889년 5월 목사 안수를 받고,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장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가 비록 6개월 후에 부산에서 사망하지만 이것이 부산지방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이  상  규
교수ㆍ고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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