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겨야 합니다

[ 논설위원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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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19일(수) 09:25

김민식/목사ㆍ동광교회


독일의 중서부에는 유명한 교회 하나가 있다. '부퍼탈'에 있는 마르크 교회이다. 아주 조그마한 교회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교회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저 유명한 '바르멘 선언'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 정부가 교회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항의했으며 또한 나치 정권의 사주를 받은 '독일 기독교'의 오류를 거부하였다.

 1백39명의 복음주의 성직자와 평신도가 '부퍼탈'에 모여 이 선언을 하였는데 그 역사적 배경은 이러하다. 1919년 히틀러가 '인종과 피의 땅'에 헌신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을 창립하였다. 그는 독일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 유대인들, 자본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독일을 구원하는 메시아적 사명을 자신이 지녔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민족주의적이고 독일 민족을 사랑한다는 명제 아래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그리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나라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교회 앞에 아주 인상적인 조형물 하나가 서 있다는 것이다. 제일 전면엔 혁명가들의 투쟁적인 모습이 만들어져 있고, 중간에 방관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맨 뒤에는 성경을 들고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이러한 폭력 앞에 '바르멘 선언'을 통해 오로지 교회만이 진리를 짓누르는 히틀러의 군사적 활보를 그리고 폭력을 길거리에서 의연하게 맞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리를 붙들고 진리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오늘 독일 마르코교회에서 보았던 그 동상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내 조국과 내 민족의 안타까운 모습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는 수많은 폭력들이 난무하고 있다. 국회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폭력을 휘두르고 정부는 공권력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고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평택에서는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전쟁을 방불케하는 폭력만이 난무했다. 사실 교회에서도 직분을 가지고 얼마나 폭력을 휘두르는지 모른다. 정치 권력의 폭력, 종교 권력의 폭력, 언어의 폭력들이 성속(聖俗)을 가리지 않고 난무하고 있다.

히틀러도 민족을 사랑하기에 역사 앞에 나섰고,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모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 하였고,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역사 앞에 얼마나 독재가 되었고 우리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파괴 하였던가? 교회나 국가의 모든 지도자들도 얼마나 잘못된 오류에 빠지는가? 그들은 진리를 붙들지 않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의 이념과 권력, 욕망을 붙들고 있기에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나의 직분이 종교권력이 되어, 그것이 폭력이 되어 교회를 망가뜨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 하는가? 섬김은 없고 군림과 지배와 통치만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섬김의 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섬기려고 하면 결단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을 끝내는 것은 간단하다. 베풀려고 하면 되고, 섬기려 하고,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언제나 불의가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정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또는 우리가 직면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정당한 취급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관계는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만남이 없는 관계는 언제나 혼돈과 멸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과 섬김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여길 수 있고, 사람을 섬길 때만이 지도자가 지도자 대접을 받으며 으뜸으로 높아질 수 있는 역설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기준은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받기를 원하느냐에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섬길 것인가?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그것에서만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고, 인격적인 교류가 있다. 그래서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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