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윤리

[ 특집 ] 8월 특집 / 경제 위기 극복 위해 한국교회가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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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13일(목) 14:10

조용훈/한남대 교수ㆍ기독교윤리

위기 속의 경제 현실

최근 들어 주가가 상승하고 환율이 안정되며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걸 보면서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경제 회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실업의 공포에 불안해하고 장기불황의 고통 한 가운데 있다. 가계부채가 늘면서 해체되는 가정이 늘고, 생계문제로 말미암는 자살자 수나 범죄율도 급증하고 있다. 노사 간의 갈등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민주주의의 근간도 위태로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의 사회의식은 정치윤리에 제한되어 있다. 물론 과거 한국교회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는 우리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를 경험한 이후 경제문제의 중요성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로 또 한 번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아직도 경제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나 언급이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불만족스러운 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경제과학에 대한 전문지식의 결여만이 아니라,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상행위에 대한 뿌리 깊은 문화적 불신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세계화되고 그 영향력도 커지면서 경제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교회도 경제문제에 대한 신학적 관심과 통찰을 요청받고 있다.

경제도 도덕문제다

흔히 사람들은 경제(학)를 몰가치적이며 윤리적 물음과는 거리가 먼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기업이란 이윤을 창출하는 데 그 존재의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론자들은 시장이 도덕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논의나 정치적 간섭도 불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경제는 국가의 간섭과 통제는 물론 도덕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머물고자 한다. 이른바 '시장 근본주의' 혹은 '시장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시장경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인간사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사회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때든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바꿀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게다가 오늘의 경제위기 원인이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나 물질에 대한 탐욕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리고 경제위기로 생긴 가난이 구조의 문제라면, 경제문제는 더 이상 도덕과 무관할 수 없게 된다. 경제력이 하나의 현실적 힘(power)으로써 인간과 사회, 심지어 자연세계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할 때, 힘의 사용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폴 사무엘슨이 말했듯이, 경제가 어떤 상품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생산할 지에 관련돼 있는 한 경제문제는 도덕문제와 떼놓을 수 없다. 인간생활에 해가 되는 마약과 같은 반사회적인 물건을 생산할 수도 있고, 노동자를 기계처럼 다룰 수도 있으며, 한정된 재화를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의 핵심 메커니즘인 경쟁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경제주체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독교윤리의 자기반성

과거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곡해하여, 신앙과 윤리라는 잘못된 이분법과 신앙을 공공영역으로부터 후퇴시키는 사사화(私事化)의 잘못을 범했다.

교회가 윤리문제에 관심갖는 경우에서조차 낙태, 동성애, 자살, 혼전순결, 이혼과 같은 개인윤리 문제에만 민감했을 뿐 정치, 경제와 같은 사회윤리 문제에는 무관심했다. 개인윤리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윤리 문제도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예로써, 오늘날 가난은 그 책임을 개인의 게으름과 나태만으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조직화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악과 제도악을 가만 놔두고 개인적 자선행위만으로 교회의 신앙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위해 봉사관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공평한 조세제도나 부동산 정책과 같은 제도나 법을 바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교회는 사회적 관심을 선언문 발표나 구호를 외치는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정책화를 위해 정치활동에도 참여해야 한다.

기독교경제윤리의 기본원칙

기독교경제윤리의 과제는 현존하는 경제체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작업도 아니고 무조건 악마시하는 도덕적 이상주의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실현가능한 경제제도를 설계하는 작업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우리는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중앙관리경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윤리적 물음에 속한다. 시장경제를 악마화하거나 우상화 하는 대신에 인간화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장경제가 다음 다섯 가지 경제윤리적 원칙 위에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적 원칙으로서 인간을 경제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빈곤의 극복에 경제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 단순히 경제성장률을 높이거나 국민총생산액을 늘리는 것에 있어선 안 된다. 둘째, 민주적 원칙으로서 기업경영과 노사관계의 민주화를 통해 경제주체들의 참여를 제도화하고, 경제력 집중을 막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원칙으로서 경제적 약자와 경제적 강자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사회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개인의 사익추구와 공공복리 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생태학적 원칙으로서 생태학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지속가능한 경제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양적 성장 대신에 질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구적 차원에서의 경제정의를 통해 세계시민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선진국과 저개발국 사이의 불평등한 경제를 해소하기 위해 초국적 금융기관과 다국적 기업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저개발국의 외채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히 모색되어야 한다.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재화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청지기라는 말의 헬라어 '오이코노모스'는 오이코스(집)의 살림살이를 맡은 사람이다. 세상을 다스려(經世) 백성을 구한다(濟民)는 말의 준말인 '경제'(economy)는 물론 자연세계의 살림살이에 관심하는 '생태학'(ecology) 역시 오이코노모스와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은 경제활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세계를 돌보고 살리는 생명의 살림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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