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수와 대외 활동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9> 계일승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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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13일(목) 14:06
김인수/미주장신대 총장

6ㆍ25 전쟁 중에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장로회신학교가 그 이름을 바꾸었다)에서 가르치다가 신학교가 부산으로 옮기게 되자 계 박사는 그곳에 가서 교수를 계속하였다. 전쟁이 휴전으로 멎자 서울 남산으로 옮겨온 신학교에서 교수를 계속하면서 학교 행정도 맡아 보게 되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교장은 박형룡박사였고, 계 박사는 교무과장으로 교무 행정을 맡아서 일하였다. 어려운 중에도 신학교는 계속 운영 되었지만 남산에 있던 신학교 부지 불하 과정에서 박형룡교장이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 걸려 당시 돈 3천만환(자유당 시절에는 화폐 단위가 환이었음)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그 책임 문제로 확대되면서 박 교장의 사퇴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이 사건으로 장로교회는 소위 '통합' '합동'측으로 나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총회까지 비화된 이 사건으로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차 총회가 난장판이 되었고, 결국 장로교회가 두 파로 나뉘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되었다. 1951년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문제로, 해방이 되자 출옥성도와 신사에 참예한 인사들 간의 갈등으로 1951년 장로교회가 두쪽이 나면서 소위 고려파(고신측)가 갈라져 나갔다. 그로부터 3년 후, 신학의 자유를 부르짖은 김재준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파가 교회를 갈라 나가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형성함으로써, 2차 분열이 되더니, 6년 후인 1959년에 박 교장의 3천만환 사건이 단초가 되어 세 번째 분열이 현실화 되었다.

통합, 합동측이 분열할 때 계 박사는 교무처장으로 많은 애를 썼으나 학교가 갈라지는 것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신학교가 있던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학교를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 박사 중심의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한 통합측은 서울 성동구(현 광진구) 광장동에 1만 6천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교사를 짓고 1960년에 신학교를 그곳으로 옮겼다. 황량한 산 중턱에 세워진 첫 교사는 예배당도 없이 교사 한 동과 남자 기숙사(현 엘림관)만 완공하고 이주하였다. 교명은 옛날 평양에 있을 때 사용하던 '장로회신학교'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박형룡교장 중심의 합동측은 용산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여 강의하다, 후에 현 관악구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이전하면서,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계박사는 분열의 혼란 속에서 1959년 교장 서리로 새 학교를 건설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였다. 1960년 장로회신학교 제9대 학장에 추대된 후 광나루에 교지를 매입하고 교사를 건축하고, 4년제 대학인가를 받는 모든 과정을 손수 이루어내면서 뛰어난 행정가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계 박사가 광나루에서 이룬 큰 사역중 하나는 한국교회의 먼 앞날을 내어다 보면서 신학교가 예과 2년 본과 3년으로 오래 내려오던 관행을 종식 시키고, 미국과 같이 일반대학 4년을 졸업한 학사학위 소지자로 하여금 신학교에 와서 3년간 신학과정(처음에는 B.D. 후에 M.Div.)을 마치고 졸업하는 제도를 한국에 있는 신학교 중 최초로 정착 시켰다. 당시로서는 모험이었으나 오늘에는 대부분의 신학교가 이 과정을 택함으로 그의 선견자적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그 후 그는 미국 교회들의 후원을 얻어 예배당, 도서관, 교수 사택 등을 건축하여, 격랑의 과도기에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안정된 토대 위에 바르게 세우는 일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필자가 신학교에 다니던 60년대 중반에 계박사는 학장으로 직접 한국교회 역사를 강의하였는데,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자상하게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 사적과 우리 선배 목사님들의 업적을 들추어내어 시대적 책무를 감당하도록 목사 후보생들을 훈계하며 소명을 고취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인자한 훈장님의 모습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는 항상 잔잔한 미소로 아버지다운 자상한 모습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을 겸비하여 방황하는 학생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준 시대의 선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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