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는 민주언론의 기수" - 신동아 1975년 3월호 특집

[ 교단 ] 34년만에 공개된 기독공보 활약상 -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전량 회수돼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9년 08월 07일(금) 15:39

1970년대는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군사정권 하에서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으로 시작돼 민주화, 인권 운동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한국교회가 이에 앞장서 예언자적인 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위 언론검열로 인한 언론 통제로 일반언론을 포함해 언론 대부분이 이런 사실을 보도하지 못할 때 본보가 민주언론의 기수로 필봉을 휘둘렀음을 밝힌 기사(신동아 1975년 3월호 특집 "자유언론의 기수 기독공보")가 공개돼 화제다.  

   
"자유언론 기수 기독공보" 제하의 기사로 실린 신동아 1975년 3월호 특집 기사. 당시 신동아 3월호는 군사정권하에서 전량 압수돼 동아일보 자료실에서조차 현재 복사본만을 소장하고 있다.

당시 본보 편집국장이었던 고환규목사(관악교회)가 최근 발굴해,본보에 제보한 이 기사는 동아일보사 신동아 담당 김언호기자와의 인터뷰로서 당시 보도로 인한 연행 및 감금,체포,고문 등 생사 기로의 현장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들어 본보를 민주 언론의 기수로 보도했으나 배포되자 마자 즉각 전량 회수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못하다가 발간된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전문을 공개하게 됐다. 현재 원본은 간데없고 동아일보사에도 복사본만 남아있는 것을 고목사가 입수, 본보에 제보해왔다.

김언호기자는 '자유언론의 기수 기독공보'가 "일반 언론이 좌초 되고 있을 때 과감한 필봉을 휘둘렀다. 70년대 전반기에 '기독공보'는 고군분투,자유언론의 찬란한 발자취를 기록했다."고 전제하고 "74년 1월8일 대통령 긴급조치가 내려져도 '기독공보'는 계속 필봉을 가다듬었다. 긴급조치령이 내려진 직후인 1월 12일자는 2면에서 '민의 존중하는 정부 염원'제하로 '국민의 기본적 자유 누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앙케이트'기사를 실었다."면서 "…교회의 민주회복, 인권회복등을 대대적으로 보도,이러한 운동을 가속화 시켰는데 10월 9일자는 예장 55회 총회의 '시국선언문'을 '구속자 석방을 촉구' '비민주적 요소 제거토록'이라는 제하로 크게 보도 했다. 동보(同報)는 때로는 사설로 강력한 대정부 발언을 계속 했다."고 보도 했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고환규목사가 동아일보사 자료실을 찾아 특집내용은 삭제된채 일부만 남아있는 1975년 3월호 신동아를 보며 그 시절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있는 모습.

정부의 인권,언론 탄압의 보도가 나갈 때마다 고환규목사는 관련 기관에 불려가서 보도에 있어 대정부 인권,언론,선교,자유 모든 부분에 제동을 받았으며 조선일보에서 신문 제작을 하는데 내부의 정보 유출로 정보원들이 조선일보까지 찾아와 신문보도내용을 게재 못하도록 하여 심한 몸싸움까지 해야 했었다고 술회했다. 고목사는 본보 편집국장 재임시 연행 구금,체포 등 심한 고문후유증으로 투병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서울관악노회 관악교회 시무중이다.

다음은 신동아 1975년 3월호의 특집 '한국언론의 현실과 제문제' 중에서 '자유언론의 기수 기독공보'를 게재한 김언호기자의 보도 97-98쪽 내용 전문이다.

'자유언론의 기수 기독공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발간하는 주간 '한국기독공보'는 '가톨릭시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일반 언론이 좌초 되고 있을 때 과감한 필봉을 휘둘렀다. 70년대 전반기에 '기독공보'는 고군분투,자유언론의 찬란한 발자취를 기록했다.

1946년에 창간된 '기독공보'는 70년 11월21일 자에서 일반 신문이 다루지 않고 있던 전태일군의 분신자살을 처음으로 다뤄 급기야 커다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71년 4월 24일자에도 일반언론이 전연 외면 해버린 '김진수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전국 섬유노조 서울의류집부 한영섬유분회원인 김씨(당시23세)는 노조 해체를  거부 하다가 드라이버로 찔려 중태에 빠졌던 것이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 하고 있던 김씨는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그후 숨졌다. 72년 7. 4 공동 성명 직후인 7월 8일자에서는 7. 4 공동 성명이 비밀리에 특정인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는점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인데도 소수에 의해 결정된 점 등을 앙케이트 방법으로 비판 했다. 당시 일반 언론은 흥분에 들떠 있었다.

73년 들어서부터 인권회복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나갔다. 73년 부활절의 박형규목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73년 10월6일자에는 '자유민주주의 정상화 희구' 제하의 기장총회의 대정부 성명을 크게 실었다. 73년 11월 24일에는 1면에 '인권침해 교회 저항 시급'제하의 김윤식목사의 회견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2월15일자는 역시 1면 톱으로 '자유민주주의 여론 존중' 제하의 교계지도들이 김총리를 방문하고 요청한 사실을 보도 했다. 

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가 내려져도 '기독공보'는 계속 필봉을 가다듬었다. 긴급조치령이 내려진 직후인 1월 12일자는 2면에서 '민의 존중하는 정부 염원'제하로 '국민의 기본적 자유 누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앙케이트'기사를 실었다. 

특히 지난해 후반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교회의 민주회복,인권회복등을 대대적으로 보도,이러한 운동을 가속화 시켰는데 10월 9일자는 예장 55회 총회의 '시국선언문'을 '구소자 석방을 촉구' '비민주적 요소 제거토록'이라는 제하로 크게 보도 했다. 동보(同報)는 때로는 사설로 강력한 대정부 발언을 계속 했다.

이같은 논조로 동보 고환규 편집국장은 지난해 1월14일 오전 동대문서로 연행되어 조사 받은 후 풀려났다가 15일 다시 연행되어 17일 풀려 났지만 서울대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고씨가 입원하자 입원하자 외국 기자들과 수 많은 교인 교역자들이 몰려 들었는데 당국은 병원에 까지 압력을 넣어 15일만에 퇴원을 해야 했다고 고씨는 회고 했다 

고씨에 의하면 당시 면회오는 목사 까지도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연재 만화 '김사무엘장로'의 작가 이화춘씨도 같이 연행되어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국내에서는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고 다만 '기독공보'가 퇴원했다는 기사를 실었 뿐이었다. 고씨는 지난 연말로 편집국장에서 NCC 인권위 간사로 전직했다.

기자들의 자유언론선언은 질식상태에서 해매던 야당으로부터도 정치적 이해의 측면에서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신민당은 10월 25일 성명을 내고 '현정권은 정보정치를 통해 언론을 억압,조작해옴으로써 신문ㆍ방송 등 일체의 언론이 기자와 편집인의 손을 벗어나 국민의 알 권리와 알릴 권리를 박탈해가고 이 수법으로 야당과 국민을 이간 시키고 야당의 분열 탄압을 감행해 왔다'고 지적하고 '뿐만 아니라 언론계 인사를 마치 우범자 인양 걸핏하면 소환 연행 문초 협박 각서 등의 악랄한 수법으로 괴롭혀 왔다'고 비난했다. 동 성명은 이어 '언론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공산주의에 이겨내는 최선의 길임을 강조하고 정부의 시대 착오적인 언론 탄압을 중지하라'고 요구 했다. 통일당도 10월 26일 성명을 내고 '전 언론계의 투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의 NYT,WP,영국의 '가디안',일본의 유력지와 AP,UPI,'로이터' 등 해외언론은 한국 언론계의 자유운동을 연일 자세히 보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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